[심상치 않았던 한·미관계] 부시, 한국만 빼고 亞·太 순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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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동안 추가 파병 요청에 미적거려온 한국에 대해 미국은 내심 못마땅해 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불만을 표시하지는 못했었다. 이라크 사태와 관련, 사면초가에 빠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동맹국인 한국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기는커녕 눈칫밥을 먹는 처지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이 파병과 북핵을 연계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자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盧대통령은 9월 24일 경남지역 언론과의 회견에서 이라크 전투병 파병 문제와 관련, "(한반도 안보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 군대를 파병한다는 것이 우리 국민들 보기에 좀 납득하기 어려운 일 아니겠느냐"면서 "뭔가 한반도의 안정에 대해 예측 가능한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의 '파병-북핵 연계론'은 미국으로부터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우선 폴 울포위츠 미국 국방부 부장관은 10월 2일 "한국군 파병을 북핵 문제와 연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어 방한이 예정된 고위급 인사의 방한 일정을 줄줄이 취소시켰다. 10월 중순으로 예정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방한을 취소한 데 이어 17일부터 시작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시아.태평양 6개국 순방 일정에서도 동맹국인 한국을 제외했다.

일본에서는 이틀이나 머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와는 도쿄 시내로 나가 철판구이로 만찬을 들며 우의를 다지면서도 두시간 거리의 서울엔 반나절도 얼굴을 비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한.미 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평소 '파병 찬성'을 주장해온 한승주(韓昇洲)주미대사가 15일 급거 귀국했다. 韓대사는 盧대통령에게 워싱턴의 분위기를 직보하면서 파병 규모와 시기.비용 등 미국의 구체적인 요청을 보고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앞서 라종일(羅鍾一)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은 12일부터 14일까지 이수혁(李秀赫) 외교통상부 차관과 함께 워싱턴을 방문,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났다.

이 방문 직후 라이스 보좌관은 "부시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우리의 이라크 정책을 지지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라이스 보좌관의 이 같은 언급은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통과를 전제로 한국의 파병 결정을 통보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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