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가을은 '이해의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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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렇게 지긋지긋하게도 비가 오더니 어느새 가을이다. 볼랜드라는 미국 작가는 '가을은 이해를 위한 계절이다'라고 했다. 이해의 계절-무슨 말일까.

계절의 순환을 인생에 비유한다면 봄은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희망의 시간이요, 여름은 삶에 한껏 부대끼며 죽도록 사랑하고 미워하며 지내는 치열한 시기이고, 가을은 지나간 나날을 뒤돌아보고 반추하며 드디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시기라는 뜻일까.

아니면 언제나 바로 눈앞의 길모퉁이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삶을 좇다 지쳐 넘어져 결국 혼자 남는 허무함과 외로움을 이해한다는 뜻일까.

오늘은 차를 몰고 학교에 나오는데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탁'하고 차창을 쳤다. 희미한 그 소리가 문득 내 가슴을 때리면서 "아, 가을이구나"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 어느덧 내 삶도 가을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을 타는지 집에 와도 집중이 안돼 무심히 인터넷을 기웃거리다 두 개의 글을 발견하였다.

<창가의 남자>

두 남자가 중병으로 같은 병실에 누워있었다. 한 명은 폐에서 물을 빼내기 위해 하루에 한 번씩 오후에 일어나 앉아있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의 침대는 그 방에 있는 단 한개의 창문 옆에 있었다. 또다른 남자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창가의 남자는 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다른 남자에게 묘사했고, 다른 남자는 바깥세상의 활기와 색깔이 느껴지는 그 한 시간을 위해 하루를 살았다. 창밖의 호수에는 아이들이 종이배를 띄웠고, 젊은 연인들은 꽃밭을 거닐었다.

몇 주가 지나고, 어느날 간호사는 창가의 남자가 평화롭게 숨을 거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쪽 침대의 남자는 간호사에게 창가의 침대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가 그를 창가 침대로 옮겨놓고 나가자마자 그는 친구가 묘사하던 창밖의 세상을 보기 위해 고통을 참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창밖을 내다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창 밖은 벽돌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여기 벽밖에 없는데 그 친구는 어떻게 그렇게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을까요?" 간호사가 대답했다. "그 분은 맹인이어서 이 벽조차 볼 수 없었는데요. 아마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려고 그랬나 봅니다."

<축복의 통계>

*당신이 오늘 아침 건강하게 일어났다면 이번 주 안에 이 세상에서 죽을 1백만명보다 훨씬 더 축복받은 셈입니다.

*당신이 배고픔을 겪지 않고 있다면 이 세상 사람 중 5억 사람보다 더 축복받은 셈입니다.

*당신이 비를 피하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75%보다 더 축복받은 셈입니다.

*당신이 은행에, 그리고 지갑에 약간의 돈이 있고, 어딘가 작은 접시에 동전을 모아놓았다면 이 세상의 8% 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 세상의 20억 사람들보다 더 축복 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웃는 얼굴로 이 모든 축복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축복받았습니다….

내 방의 작은 창밖으로 유난히 파란 하늘, 그리고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노란 화관을 쓰기 시작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문득 나는 생각한다. '이해의 계절'이란 어쩌면 이제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한 이 지상의 삶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축복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이 땅에 손톱만큼이라도 기쁨을 남기고 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할 때를 말할지도 모른다고.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