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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알알이 시가 익어 가는 포도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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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흙을 닮은 시인을 알고 있다. 해 뜨면 포도밭에 나가고 해 지면 시 앞에 앉는 시인을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은 류기봉(41).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산 95번지 일대에서 포도농사 짓는 농부요, 13년 전 고(故)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가 첫 산문집 '포도밭 편지'(예담)를 내놓았다. 시인의 소감에서 농사꾼의 땀방울이 뚝뚝 듣는다. "포도 수확에 맞춰 첫 산문집을 내다보니 올해는 자식농사를 두 번이나 지은 듯 뿌듯합니다."

산문집은, 아기자기한 글귀 그러모은 여느 시인의 에세이와 한참 다르다. 서른 해 넘도록 가지치기 가위를 잡았던 시인 아버지의 손바닥 마냥 투박하다. 그래서 좋다. 17년째 포도를 키우는 농사꾼의 진솔함이 묻어나서 좋다.

시인에겐 두 가지 농법이 있다. 하나가 자연농법이다. 농약 따위는 치지 않는다. 대신 지렁이를 풀어놓는다. 알고 보면 지렁이 배설물도 흙이다. 지렁이 몸을 거치며 건강을 되찾은 흙이다. 시인은 예서 그치지 않는다. 포도나무에게 포도주와 포도즙을 먹이고, 포도순 녹즙도 먹인다. 제 몸에서 난 것이자 제 몸의 밥이니 약으로 삼는 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자연은 그렇게 순환한다.

또 다른 하나가 '문화농법'이다. 포도밭에선 9월 첫주 토요일마다 잔치가 열린다. 이름하여 '포도밭 작은 예술제'. 생전 김춘수 시인의 말씀을 받들어 올해로 9번째 열고 있다. 포도밭엔 모차르트의 선율이 흐르고 정현종.정진규.이문재.박주택.문태준 시인 등의 친필 시가 포도나무에 걸린다. 시도 낭송하고 음악회도 연다. 잔치가 끝날 즈음엔 포도를 발로 밟아 포도주도 만든다. 이날 빚은 포도주는 이듬해 잔치 때 쓰인다. 마침 오늘이 9월 첫주 토요일이다.

산문집은 울림이 크다. 어여삐 단장한 문장 아니어도 눈가가 시리다. 시력을 거의 잃은 시인의 아버지가 나무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당신의 나무 수천 그루를 일일이 깨문다는 대목 앞에서는, 한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농사도 짓는 것이고 시도 짓는 것이다. 둘은 결국 한 가지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아니 농사꾼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시 공부를 해서 자격증(등단)을 땄는데 시는 돈이 안 된다. 포도 공부를 10년 이상 하고 있는데 포도도 돈이 안 된다. 내가 열심히 잠도 자지 않고 한 공부는 모두 돈이 안 된다."

노곤한 토요일이지만,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시 구경 나오시라 권한다. 오후 3시면 장현리 포도밭의 시, 알알이 익고 있을 것이다.(016-346-2859).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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