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약·선회는 중력초월한 신기 |내가 본 볼쇼이발레단 공연<연세대 최정호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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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유럽 발레의 정수가 서유럽에서보다 소련에 더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발레는 볼셰비키 혁명을 치르면서도 용케 살아남은 것이다.
사실 1917년을 전기로 제정러시아와 소비에트 러아아사이에는 모든 예술분야에서 단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직 발레예술에 있어서만은 혁명이전과 혁명이후에도 아무런 역사적·양식적 단절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미국이나 서유럽에선 가령 맨발의 이저도라 던컨이나 표현무용의 마리 비그먼처럼 전통적인 발레에 대한 혁명적인 모반·이탈의 움직임이 접종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련의볼쇼이 발레나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발레는 어떠한 혁명적인 안티(반)발레 운동도 거부하고 제정시대의 발레전통을 그대로 이어온 콩세르바뢰르(보관자)라 해서 틀림이 없는 것이다.
볼쇼이 발레의 수준을 단적인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면 88올림픽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련체조의 메달리스트들이 토 슈즈를 신고 춤을 춘다고 생각하면 될것이다(원래 체조와 발레는 같은 모태에서 나온 쌍생아다).
그러고 보니 나 개인적으로는 특히 볼쇼이 발레의 발레리나보다 발레리노(남성무용수)들의 절묘한 기예에 매료되곤 한다. 그들의 중력을 초월한 그랑 소테(대도약), 또는 피루에트(선회)등은 도무지 사람의 짓 같지가 않은 「신기」이다.
발레의 역사에서도 화니체리토, 화니 에슬러, 마리 탈리오니등의 전설적인 무희가 군림했던 19세기의 로맨틱 발레가 여성무용가의 절대권을 확립했던 때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20세기는 남성무용의 르네상스로 막을 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그 막을 여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것이 디아길레프, 니진스키, 세르게이 리화등의 러시아발레였다.
이 남성우위의 러시아발레 전통이 그대로 혁명기를 거쳐 오늘의 볼쇼이 발레에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방세계에서조차 지금 경쟁자의 모습이 보이지않는 정상을 홀로 독점해온 누례예프나 바리시니코프같은 무용가들은 모두 러시아 출신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발레에 빼어난 여성무용가들이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안나파블로바를 위시해 갈리나 울라노바, 마야 플리세스카야등은 이미 20세기 발레사의 불멸의 성좌군에 오른 프리마 발레리나 아솔루타들이다.
나는 예전에 유럽에 체재하고 있을때 볼쇼이발레를 두번 본일 밖엔 없다. 오스트리아 중립화독립 경축예술전에 그때 막부임한 유리 그리고로비치 단장의 인솔하에 참가한 볼쇼이 발레는 『쇼피니나』(일명 공기의 정) 『백조의 호수』(제2막) 『발푸르기스의 밤』3편으로구성된 갈라 공연에 이어 다음날 장편 로맨틱 발레『지젤』을 내놓았다.
갈라 공연에선 나는 『발푸르기스의 밤』에 압도되어 버렸다. 준마와 같은 근골을 가전 발레리노들이 뛰고 맴돌고 하늘을 나는(!) 주신제·지신제에서의 춤은 러시아 발레에서의 남성 무용가들의 기와 예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해방의 대향연―.
다음날 『지젤』에선 내가 좋아하는 마리나 콘드라체바가 벌레처럼, 잠자리처럼 아니 모기처럼 중력을 벗어나 그야말로 요정이 되는 춤을 추어 보였다. 그것은 어느 평론가 말처럼『이 모든 지난의 기예를 더할 나위없는 우아함으로 힘도 들이지 않고 추어내는 하나의 기적.』―
나는 볼쇼이 발레를 구경하고 돌아온 날 밤의 일기에 『내일 비엔나를 떠나도, 아니 내일 유럽을 떠나도 이제 구경에는 여한이 없다』고 적은바 있었다.
그 볼쇼이 발레를 그때의 그리고로비치가 인솔해와 서울에서 공연하는 것을 다시 구경할수있게 되었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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