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또 국제 망신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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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이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태평양 총회에서 30일 갑작스럽게 철수했다. 이날 오전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조찬 기자간담회에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의 노사협상 상황을 설명한 것이 원인이 됐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장관 기자간담회 이후 "(이상수 장관의 발언은) 정부가 노동계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회의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29일부터 3박4일간 열리는 이번 총회는 40여 개국 노.사.정 대표 600여 명이 참석한 국제행사다. 이 위원장은 한국노동계 수석대표로 사실상 이번 총회의 호스트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노총의 이런 행동으로 한국 정부와 노동계는 또다시 국제적인 망신을 사게 됐다. 향후 노.정 관계가 급랭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무책임한 한국노총=이 위원장은 이날 낮 12시45분 부산 벡스코 프레스센터에서 긴급 내.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이 위원장은 "이 장관이 국제회의 도중에 일방적으로 논의가 진행 중인 로드맵 내용을 공개하고, 노사 합의 사안에 대한 거부의 뜻을 밝힌 것은 정부가 노동계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노사정 간의 신뢰와 사회적 대화가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ILO 총회는 우리 노동계로서는 의미가 없다"며 "즉각 ILO 아태총회에서 철수한다"고 밝혔다.

ILO 아태총회는 당초 지난해 10월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가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 퇴진운동을 벌이면서 총회 참석을 거부해 무산됐다가 9일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총회 개막일을 전후해 민주노총이 집회를 열고, 한국노총마저 철수하는 등 ILO 총회는 노.정 갈등으로 얼룩지게 됐다. ILO 측은 이 위원장에게 "한국의 노.정 문제는 별도의 토론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며 총회 철수를 만류했다.

부산대 황한식 교수는 "국제회의 주최자가 국내 갈등과 국제문제를 구분해서 대응하지 않고 손님을 버려 두고 가는 것은 경솔해 보인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협상 내용을 공개한 정부에도 1차적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이날 오후 한국 노동계 수석대표를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에게 위임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우리는 로드맵 자체를 거부하며 투쟁해 왔다"며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는 만큼 ILO 총회에 계속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이 장관도 미숙했다=이 장관은 조찬 기자간담회에서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9월 7일 입법예고를 강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용득 위원장이 환경이나 안전 분야에 종사하는 전임자에겐 임금을 주고, 노사관계를 전담하는 전임자는 무급화하는 등 직무별로 차등을 두자는 제안을 했다"고 소개했다. 재계는 물론 노동부 내부에서도 이 장관의 발언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협상 중인 사안에 대해 막후에서 주고받은 노사의 양보안까지 공개한 것은 뜻밖"이라고 의아해 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장관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노.정 관계 급랭=이 위원장은 다음달 2일로 예정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불참할 뜻을 밝혔다. 노.정 간 갈등도 첨예해질 전망이다. 노사정위원회 관계자는 "한국노총은 그동안 로드맵 협상 과정에 노사정 간의 다리 역할을 해 왔다"며 한국노총이 빠지면 로드맵 협상이 어려워질 것으로 분석했다.

부산=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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