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음치불가] 나훈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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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과거는 쓸모없는 장애물이 아니라 교훈과 힌트를 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미래를 대처하는 데 필요한 비축물이기도 하다. 과거의 재료를 끊임없이 재사용하고 있는 음악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국내 음악계의 거목 나훈아는 가장 최근의 가수들까지도 다양한 자극과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가요계의 필수 비타민 같은 존재다.

'해변의 여인''물레방아 도는데' 등 셀 수 없이 많은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는 나훈아는 지금까지 2500곡이 넘는 곡들을 발표했다. 놀라운 것은 그중 800곡 이상을 직접 작곡했다는 것이다. 가수는 단지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곡까지 직접 쓴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셈이다.

데뷔 때부터 줄곧 투박하고 야성적인 이미지를 견지하고 있는 나훈아는 성량이 풍부하고 힘도 좋다. 창법의 기교적인 면을 앞세운다기보다는 육성 자체를 기반으로 한 소리다. 따라서 그만큼 소리와 노래가 자연스럽다. 탁 트인 육성을 중심으로 흉성적인 깊이와 비성, 그리고 두성까지 고루 안배해 노래하는 것이다. 소위 '나훈아식 꺾기'는 그의 대표적인 창법상 특징이다.

이것은 서구의 R&B식 '꺾기'와는 다르다. 우리의 민요와 국악 등 전통적인 음악풍에 기반을 둬 그 자신이 독창적으로 만든 '나훈아표 꺾기'는 가히 국보급이라 할 만하다. '꺾기'를 잘하려면 일단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잘 풀려 있어야 한다. 그만큼 나훈아는 역동적인 노래를 함에도 오히려 목의 유연성이 돋보인다.

나이를 초월해 여전히 쩌렁쩌렁 울려대는 성량도 주목할 만하다. 목소리에 힘을 공급하는 것은 노래하는 사람의 호흡(엔진)이며 성대는 바이브레이터이자 미션(기어)의 역할을 한다. 1966년에 데뷔한 '구형 엔진'임에도 나훈아의 그것은 여전히 빼어난 성능을 발휘하고 있다.

정말 노래를 잘하는 사람에게선 발성이나 창법 등을 떠나 그만의 아우라가 전달된다. 짙은 감정주입을 통한 절절한 호소력은 듣는 이에게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경험케 한다. 세대를 초월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훈아의 곡들이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리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리라.

한국을 대표하는 '명인'인 그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정서와 한을 담은 전통가요를 트로트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강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우리의 독특한 민족적 정서를 잘 담아 내고 있는 장르가 그 느낌과 인상이 살아있는 용어 대신 단순히 서구 리듬 중 하나인 트로트로 불리고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조성진 음악평론가.월간지 '핫뮤직'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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