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대연합과 일본경제: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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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안정 힘입어 연평균 11%성장/59∼61년/자민당 독주는 재계지원이 결정적/조화살린 「경제밀월」강국기반 다져
가위ㆍ바위ㆍ보­일본의 정치가ㆍ관리ㆍ경제인들의 역학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동경대 이노구치(저구효)교수는 『정치가는 관리를,관리는 경제인을,경제인은 정치가를 움직인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을 움직이는 세기둥을 가위ㆍ바위ㆍ보로 비유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도우면서 일본주식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셋중 어느 하나가 삐끗해도 일본사회는 불안정해진다. 그럴때는 이를 바로세우기 위해 다른 두 요인들이 노력하게 된다.
한국전쟁 특수(50∼52년)가 끝나 경기가 침체된 53,54년 보수진영이 극심한 대립을 계속하자 재계가 이를 견재해 바로세우려 했던 것은 이미 잘알려진 사실이다.
54년2월 내각불신임에 대해 의회해산으로 맞서려던 자유당의 요시다(길전무)수상은 재계가 등을 돌리는 바람에 물러나야 했다.
당시 이들의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 재계장로들은 『의회해산을 한뒤 총선에서 정치자금을 받으리라고는 아예 기대도 하지 말라』며 요시다측을 위협,의회해산없이 수상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후 요시다와 앙숙관계인 민주당의 하토야마(구산일랑)가 수상이 됐다.
55년 11월에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보수대연합을 이루면서 자민당 장기집권의 문을 열었는데 재계가 뒤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잘 훈련된 관료와 왕성한 기업활동으로 쾌조의 항진을 계속하던 일본 경제는 정치가 안정되자 순풍에 돛단듯 앞으로 질주해 나갔다.
보수대연합을 이룬후 일본경제는 56년부터 2년간 이른바 신무(옛천황이름)경기로 불리는 호황을 맞게된다.
실질경제성장률이 56년 7.4%,57년 8.1%였으며 민간설비투자는 각각 39%,25.1%를 기록했다. 보수대연합에 의한 정치안정으로 왕성한 설비투자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같은 높은 경제성장은 58년의 조정기를 거쳐 59년부터 3년간 다시 계속돼 고도성장(암호경기로 일컬어짐)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기간중 실질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1.6%,민간설비투자증가율은 연평균 31.5%나 됐다.
특히 설비투자를 위한 설비투자가 전체 민간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년에는 42%까지 올라갔다. 투자가 투자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같은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자민당은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학생ㆍ노동자ㆍ야당은 전국 곳곳에서 반대집회를 갖고 격렬한 항의시위를 했다. 국철파업,사회당의원들의 의원직사퇴,전학련데모대의 국회난입등 미일안보조약 반대투쟁은 마치 한일회담 반대때의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급기야는 경찰과 데모대의 충돌로 사망자까지 생겼다. 기시(안신개)수상은 미일안보조약이 발효되자 60년7월 물러났다. 미일안보조약의 우산아래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재계의 짐을 기시가 혼자 떠맡은 셈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이케다(지전용인)수상은 민심을 일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정치로 향한 국민들의 눈을 딴곳으로 돌려보자는 목적이다.
이케다는 국민소득배증계획을 내놨다. 10년간(61∼70년)국민소득을 배로 늘려 놓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는 경제성장을 최대의 가치로 삼고 모든 역량을 이에 투입했다. 재계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정치가와 관료가 산업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성장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이른바 일본주식회사며 고도성장의 비결이었다.
정부는 항상 산업계와 협의하고 업계는 정부정책을 지원하는 협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의무처럼 되었다.
자민당이라는 거대여당을 배경으로한 정국안정은 경제계에 그만큼 활력소가 되었다.<이석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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