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하면 근본 잃는다”/고흥문(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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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문사에서 「시평」 필진으로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사실 조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쓰면 무얼 쓸까하는 생각에서 였다.
필자는 2대 민의원선거 당시 유석 조병옥박사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뛰어든 이래 줄곧 야당생활로 일관했고,5ㆍ17 이후는 그나마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처지라 마땅한 소재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정치문제에 대해 자주 왈가왈부하게 되면 현역들의 심모원로를 용훼하는 결과가 되고 말뿐 고언으로서의 값어치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밖에 있을 수 없다』는 말처럼 필자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 역시 오늘의 정치현실에 대해 의견을 말하지 않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야당의 두가지 전통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할 때마다 필자는 우선 야당의 오랜 전통을 떠올려 본다.
첫째는 민주투쟁의 전통이다.
1공에서 5공까지의 기간은 독재정권과의 처절한 투쟁기간이었다. 야당세력은 가끔 이합집산을 되풀이 했지만 독재에 항거하는 불굴의 투지에 있어서는 오로지 한몸,한뜻이었다.
둘째는 대동단결의 전통이다.
독재정권의 공작앞에 지칠대로 지친 야당이 때때로 분열상을 드러내긴 했어도 대사 앞에선 하나로 뭉쳐 싸웠다. 적어도 전통야당세력은 그러했다.
뭐니뭐니해도 이 두가지 전통이야말로 국민의 뇌리에도 깊게 각인된,양당의 진면목을 채색하는 요소로 야당 정치인들에겐 정치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를 안겨주는 요인이었다.
필자가 시국평을 부탁 받았을 때마다 우선 야당의 대동단결을 강조해온 것도 실은 10년 가까이 뒷전에 물러나 앉은 사람으로서의 넋두리가 아니라 그러한 전통으로의 복원이야 말로 정국안정ㆍ정치발전의 첩경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주장에는 이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오늘의 전통 야당세력은 본래 한뿌리에서 태어났다. 기질도 비슷하고 정견도,철학도 흡사하다. 그런 세력이 분열되어 상호 반목하고,그래서 정국불안이 증폭된다면 그게 어찌 자연스러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정치란 무엇이겠는가. 학자들의 정의가 어떻든 필자의 오랜 경험으로 말하라면 일체의 수사적 표현을 배제하고 「국민이 마음편케,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하는 일」,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는다.
나라를 걱정하는 어떤 지성인 모임의 취지문에서 읽었던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세상에 태어나 어떠한 환경에 놓이게 되든,또는 어떠한 직업을 갖게 되든 기본생활을 영위함에 지장을 받지 아니하고 자녀들을 마음편히 교육시킬 수 있으며 그러한 삶의 기초위에 서로 웃고 사랑하며 밝게 살아 갈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정치란 바로 그것을 가능케하는,고도로 정제된 활동을 통해 국민이 주인답게 편히 지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어수선한 여소야대 정국을 보며 나름대로 정책 공조­야권통합­보수연합­보혁구도의 수순을 밟아 우리 정계가 좀 정돈되기를 희망해왔다.
그 이유는 장차의 통일에 대비하는 한편 다원사회를 맞아 우리 정치가 늘 고리타분한 보수의 틀 속에 묶여 있어도 안될 것이기 때문에 혁신을 대칭개념으로 한 진보적 보수와 이데올로기 통합의 전위역할을 할 혁신이 서로 병립하는 구도가 바람직하다고 본 까닭에서 였다.
○대 여당을 보는 불안
그것은 야권통합의 수순에서 짧게 보면 정국안정이 되고,보혁구도 수순에서 길게보면 정치발전ㆍ안정지속에 도움된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바로 엊그제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이 연합하여 신당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언론의 표현대로 가위 혁명적인 발상이다.
무엇보다 여야의 통합,4당구조의 개편,대여당의 출현이라는 점이 그렇다. 어쩌면 이런 형식보다 구연을 청산하고 미래에 대비하겠다는 발상의 대전환이 충격적이다. 충격적인 만큼 일말의 불안을 숨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는 지역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다.
종래의 4당구조 자체가 특정인 중심의 지역당구조였으므로 차라리 바람직한 통합구도는 「동ㆍ서의 결합」 형태였다.
둘째는 다시 선명논쟁이 불붙을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3당의 연합이 행여 기득권 수호ㆍ차기정권구도를 위한 포석으로 비쳐지게 되면 이에 반발하는 세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게 자명하다.
셋째는 향후 노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정치행사의 연속에 따른 소모전이 더욱 가중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다.
어차피 지자제ㆍ총선ㆍ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지만 개편에 따른 후유증,오월동주격의 3당 통합에서 예상되는 파워게임 등을 염두에 두면 안정구도를 속단키는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내각제 개헌의 추진에 따른 정파간 이해조정에서 야기될 정국동요,권외로 밀려난 정치인들의 거취를 둘러싼 갈등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지각변동을 방불케 하는 3당 통합은 명분상 국제정세 격변과 남북관계 진전에 대비하는 중도민주세력의 결집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명분이 현실화하자면 정말 환골탈태의 의식전환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 정국을 좌지우지해온 1노3김중 1노2김이 손을 잡았다고 해서 곧바로 중도민주세력의 결집이 성사 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정국안정이 곧 실현된다고 단언키 어렵다.
왜냐하면 4당구조 개편의 명분론으로 제기되던 소모적인 정치폐단이 일견 불식된 것처럼 보이나 한편으론 의회의 견제기능ㆍ정책개발 경쟁이라는 4당구조의 반사이익이 줄고 다시 대집권당이 야기할지도 모르는 관권우위ㆍ정경유착ㆍ과두적 정치의 우려가 새롭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집권당이 정국안정에 필수적 기능을 하자면 의석의 과점도 중요하나 그보다는 다양한 민의의 수렴에서도 과점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 신당이 언로를 트고 당내 민주주의를 실현할지 더 두고 지켜볼 일이다.
○소야 평민당이 할 일
한편 졸지에 반대당이 된 평민당은 그들 말처럼 유일야당이 될지는 몰라도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하면 향후 그들이 야당구실을 옳게 한다는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야당은 의석수가 적어 서러운 존재가 아니라 한쪽의 민의를 당당히 대변하는 필수적 존재인 것이다.
3당 통합의 주역인 1노2김과 홀로된 1김 모두가 명심할 점은 「조급하면 근본을 잃는다(조측실근)」는 옛 경구다.
4당구조가 되었든,4당구조의 변혁이 되었든 그 반사이익을 얻는 주체는 「어떤 김씨」가 아니라 「언제나 국민」 임을 제발 잊지 말아 주길 바란다.<전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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