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 경마 빠진 40대 택시기사 "8년 만에 1억 날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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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대전시 대덕구 평촌동 평촌중소기업단지 내 사행성 게임인 '바다이야기' 게임기 제조공장이 전선 코드와 선풍기 등만 남은 채 텅 비어 있다. 임대공장 관계자는 "3주 전 공장 계약을 갑자기 해지하더니 최근 공장 물건을 모두 가지고 철수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7 나온다, 7!" "그래, 머리를 쳐라!"

25일 오후 6시 서울 영등포에 있는 경마 장외발매소. 13층짜리 건물의 3~9층에 위치했다. 평일인데도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 북적거렸다. 경기를 중계하는 모니터 앞자리 쪽은 아예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작업복 등 허름한 차림의 40~50대 남성이 많았다. 여성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말들이 결승선에 다가가자 사람들의 고함은 거의 비명에 가까워졌다. 결국 5번 말이 7번을 간발의 차로 제치고 결승선을 먼저 통과하자 여기저기서 "어휴"하는 탄식과 함께 욕설이 쏟아졌다. 이날 12번째 마지막 경주는 이렇게 끝났다.

국내 최대 규모인 영등포 장외발매소는 하루 평균 1만 명이 몰려 연 25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하루에 고객 한 명이 26만원가량의 돈을 경마로 잃는 셈이다.

'경마 경력 8년차'라는 운전기사 최모(49)씨는 "오늘 한번도 못 따 20만원을 잃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1억원은 족히 날렸다"는 그는 "요즘도 한 달에 월급의 절반(100만원)은 경마로 날린다"고 털어놨다.

장외 발매소엔 최씨처럼 주말마다 찾아와 수십만원씩 날리고 가는 서민이 상당수였다. 최소 100원에서 최대 10만원을 걸고 '대박'을 꿈꾸는 것이다. 한 경주에 걸 수 있는 상한액은 10만원. 그러나 여러 개의 발매창구를 돌며 얼마든지 더 걸 수 있어 사실상 상한액이 없는 도박으로 변질하고 있다. 하루에 수백만~수천만원을 잃는 사람도 있다.

건축 현장에서 노동일을 한다는 박모(48)씨는 "여기는 전부 나 같은 노가다(일용직 노동자)"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일당(6만5000원)의 네 배가 넘는 돈을 잃고 갔다.

◆연간 100조원대 '사행성 도박'시장=장외 경마.성인오락실.온라인 도박 등 사행산업은 서민들의 피해를 키우고 있다. 정부는 현재 5대 사행산업(경마.경륜.경정.카지노.복권)을 허용하면서 '세수 확대'와 '소득 재분배'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때문에 각종 규제도 철폐하는 추세다. 경마뿐 아니라 경륜.경정까지 장외 발매소를 허가한 데 이어 성인오락실에 경품용 상품권의 사용을 허가하면서 지난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5대 사행산업의 지난해 규모는 13조8898억원. 여기에 성인오락실, 사행성 PC방, 불법 카지노바 등의 연간 규모 88조원(국정원 보고서 추정)을 모두 합치면 101조가 넘는다. 2006년 우리나라 예산(144조8000억원)의 70%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이를 국민 1인당 액수로 환산하면 한 사람이 1년에 216만원가량을 사행산업에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서민들만 골병=정부의 취지와 달리 사행산업은 서민의 주머니를 더 얄팍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부가 올 1월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복권을 제외한 경마.경륜.경정.카지노 이용객 가운데 월소득 200만원 미만이 32%로 가장 많았다. 200만~299만원이 29%로 뒤를 이었다. 직업별로는 노동이 36.3%로 제일 높았다. 사행산업이 수익을 올리는 대상은 주로 중하위 계층이란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이철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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