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따분하나요 … 여기 '환상특급' 티켓 다섯 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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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아라비아의 왕이 첫날밤 신부 세헤라자데를 죽이지 못하고 내일, 또 내일 하면서 1000일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이야기의 마력 때문이었다. 그 옛날, 어른들이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아이들에게 겁을 줬을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욕구는 원초적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 책 역시 우리가 얼마나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한다.

'사고루(沙高樓)'는 도쿄 시내 한 고급 빌딩의 펜트하우스에서 열리는 이야기 모임. 사회에서 최고 지위에 오른 소수만이 회원이 되는 비공개 멤버십 클럽이다. 이들은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번갈아가면서 풀어놓는다. 규칙은 두 가지. 과장이나 미화는 하지 말 것과 들은 얘기는 절대로 밖에 옮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데카메론'의 냄새를 살짝 풍기는 소설은 다섯 명의 신사 숙녀의 입을 빌어 다섯 가지의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현실적인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그저 이상하고 야릇하며 불가해한 사건들이다. '대장장이'는 일본도 감정을 대대로 업으로 삼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벌어진 위작 사건. 도저히 가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도검들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감정가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실전화'는 한 정신과 의사가 어린 시절 전학 가 헤어진 여자친구를 훗날 공교로울 정도로 빈번히 마주치는 이야기다. 신혼여행지에서까지 만나게 된 옛 여자친구는 정녕 귀신일까? 시대영화 촬영장에 나타난 정체 모를 사무라이 엑스트라를 둘러싼 소동을 그린 '엑스트라 신베에'. 대본 어디에도 그가 맡았다는 '다치바나 신베에'라는 배역은 없었다는데….

이밖에 '정원 가꾸기의 여왕'으로 촉망받는 한 여인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함께 해온 정원지기 노파의 고백('백 년의 정원'), 보스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열일곱살 소년이 휘말린 사건과 뜻하지 않은 결말('비 오는 밤의 자객') 등이 뒤를 잇는다.

비밀과 오해, 우연, 집착, 인생의 아이러니 등을 키워드로 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리석고도 영악하며 아름다우면서도 추한 인간군상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비단 '사고루'의 회원만은 아닐 것이다. 읽는 이마다 취향이 다르므로 순위를 매기긴 어렵지만 드라마틱한 재미로 따지면 '대장장이'가 눈에 가장 들어온다. '백 년의 정원'은 '철도원'의 작가다운 지극히 섬세한 문장 속에 서린 섬뜩한 내용이 주는 충격이 둔중하다. '비 오는 밤의 자객'은 '인생이란 참…' 하며 입맛을 쩝쩝 다시게 하는 묘한 여운이 있다.

이야기꾼들은 늘 우리를 홀릴 준비가 돼 있다. 아사다 지로는 그중 한 명일 뿐. 바쁘면서도 따분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주전부리가 될 만한 단편집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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