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이탈리아 레바논 평화유지군 지휘권 놓고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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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레바논 주둔 유엔 평화유지군(UNIFIL)의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UNIFIL의 지휘는 프랑스가 맡아 왔으나 이탈리아가 대규모 병력 파병을 내세워 지휘권도 갖겠다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두 나라 간 기 싸움은 파병규모 증원 경쟁으로 이어졌다.

빌미는 프랑스가 제공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17일 레바논 주둔 유엔 평화유지군에 이미 배치된 프랑스 병력 200명 외에 200명만 추가 파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프랑스에 핵심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국제사회의 비난과 불만이 쏟아졌다.

그러자 이탈리아가 증파 카드를 빼들었다. 22일 이탈리아의 마시모 달레마 외무장관은 최종적으로 2000~3000명 규모의 이탈리아군을 증파해 유럽에서 파병되는 병력의 3분의 1을 차지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아울러 그간 프랑스가 맡아온 기존의 UNIFIL 지휘권도 이탈리아가 넘겨받겠다고 제안했다. 이틀 만에 프랑스의 대응조치가 나왔다. 시라크 대통령은 24일 UNIFIL에 자국군 2개 대대 병력 1600명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모두 합쳐 이탈리아가 밝힌 규모에 버금가는 2000명이다. 시라크 대통령은 또 유엔이 원한다면 평화유지군 지휘권을 계속 맡을 준비가 돼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왜 발벗고 나서나=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앞장서 비난하고 있는 두 나라 정상이 레바논 사태에 적극 나서는 것은 이번 일을 '우리 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 두 나라와 레바논의 지리적.정치적 근접성이 이들로 하여금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만들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과거 레바논을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했었고 이스라엘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에다 헤즈볼라를 후원하는 시리아.이란과도 외교채널을 가동하고 있어 레바논 사태 해결에서 주도적인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

두 나라에 무슬림 이민자들과 유대인이 많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무슬림의 유럽 유입 창구였던 이탈리아는 이들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우호적인 나라였다. 프랑스에는 현재 600만 명의 무슬림과 6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환영하는 미국=미국으로서는 두 나라의 경쟁이 흐뭇하기만 하다. 평소 국제 외교 무대에서 '눈엣가시'였던 두 나라가 앞다퉈 미국의 짐을 덜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24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로마노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부시 대통령은 프로디 총리에게 이탈리아가 최대 3000명의 병력을 파병키로 한 데 대해 '긍정적인 시각(positive view)'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성명을 통해 프랑스의 결정에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탈리아와 다른 주요 동맹국의 의미 있는 약속만큼 프랑스의 결정에도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지휘권과 관련, 부시 대통령은 프랑스의 입장을 옹호했다. 부시는 "레바논에 모두 2000명의 병력을 파병하고 지휘권을 계속 유지하기로 한 시라크 대통령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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