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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 벽 허문 김광한씨 부부(마음의 문을 열자: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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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고향은 왜 자꾸 따지나요”/반대하던 장인 “우리 사위가 최고”/식장서 양가 친지들 서로 손잡아
『그놈의 경상도ㆍ전라도가 뭔지…. 장인될 어른이 경상도 사람에겐 절대로 딸을 줄수 없다며 집에도 못들어오게 문전박대 하실땐 차라리 다 그만둘까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어요.』
「결혼을 그만두려 했었다」는 말에 부인은 곱게 눈을 흘기면서도 가만히 남편의 손을 꼭 잡는다.
김광한(28ㆍ회사원) 서창란(26)씨 부부.
첫딸(현선ㆍ1)을 데리고 10일오후 결혼식 주례를 서준 서울 신문로1가 지역감정해소 국민운동협의회 김형문사무총장을 찾은 김씨부부는 「말도많고 탈도많은」 영ㆍ호남의 지역감정을 깨고 단란한 가정을 꾸민 젊은이들이다.
남편 김씨는 조상대대로 경북 영천군에서 농사를 지어온 경상도 토박이고 부인 서씨집안은 전남 벌교의 터줏대감.
벌교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서양과 대구대 사범대를 휴학하고 공군에 입대한 김군이 만난것은 85년6월.
서울 공군본부에서 문서를 수령해 부산의 부대로 돌아가던 김상병은 기차안에서 휴가를 받아 친구들과 함께 대구로 놀러가던 서양을 만났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두사람 모두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영ㆍ호남 사람은 결혼하기 힘들다」는 친구들의 충고는 이해할수 없었다.
그러나 4년여의 열애끝에 88년 결혼을 준비하면서 이들도 엄청난 가족들의 반대에 부닥쳐야 했다.
『건실하고 믿음직하다면서도 경상도남자는 무조건 안된다며 살다보면 안다고 막무가내셨어요.』
처음엔 반대하던 김군 집안에선 서양을 만나보고 결국 결혼을 승낙했다. 그러나 신부집안에선 장인이 끝까지 버텼다.
『장인이 인사도 받지않고 쫓아냈던 적도 여러번이었지요, 남북이 가로막힌 것도 서러운데 주먹만한 땅덩어리에서 지역감정이 뭡니까.』
김씨 부부는 89년4월 결국 결혼했고 그때의 주례는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사무총장 김씨였다.
『주례선생님이 영ㆍ호남의 양가친지들에게 언제까지 후손들에게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형벌처럼 물려줄 것이냐고 호통치셨어요. 이제는 제발 서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자는 간곡한 당부와 함께요.』
김사무총장의 주례사가 계속되는 동안 신부 서씨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2백50여 하객들도 숙연하기만 했다.
주례사가 끝나고 눈물로 화장이 엉망이 된 신부가 신랑과 함께 하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때 맨먼저 달려나와 신랑의 손을 잡은것은 가장 결혼을 반대해온 신부아버지였다.
양가의 다른 친지들도 비로소 사돈이 된 서로의 손을 잡으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이제는 우리사위 최고라고 자랑이 대단하세요. 우리의 결혼이 양가의 고질적이던 지역감정을 깬셈이죠.』
김씨 부부는 사랑하면서도 가족들의 편견과 아집으로 헤어지는 젊은이들이 더이상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렵게 결혼한만큼 영ㆍ호남부부는 더욱 금실이 좋다』는게 남편 김씨의 말이다.
『국민모두가 지역감정은 망국병이고 일본의 민족분열정책과 독재정권의 부산물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지역감정을 깨기보다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김사무총장은 우리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지역감정이란 망령을 떨어내지 못하고선 민주화도,통일도 결코 이룰수 없다고 강조했다.
89년4월부터 이 협의회가 시작한 지역감정해소 서명운동에는 2백30만명의 시민이 서명했지만 결국 개개인의 「일상에서의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게 김사무총장의 지론이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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