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꾼주미경의자일끝세상] 인제군에 나타난 수퍼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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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익스트림라이더 등반교육 때 만났던 그들을 의정부 샤모니 실내암장에서 다시 만났다.

"어떻게 좀 한가해졌나요?" "아, 당연한 일 가지고 엄청 시달렸어요. 하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글쎄요, 장비가 있고 그걸 사용할 줄 아니까…."

순식간에 계곡을 넘어 쳐들어오는 물을 보며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차에 있던 등반장비를 꺼내온 것이었다. 물살에 휩쓸려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집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고립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도대체 없더란다.

"우리가 등반하다 보면 위기상황에 많이 부닥치잖아요. 그때 필요한 게 뭐겠어요? 평정심이죠."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가족에게 전화도 했다. "아빠가 지금 좀 안좋거든. 그러니까 엄마 말 잘 듣고, 동생 잘 돌봐주고…." 조우령씨가 열어놓은 노트북 화면의 사진에는 사방으로 흙탕물이 휩쓸어가는 가운데 놓인 집에서 세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웃고 있었다. 퍼렇게 웃고 있었다. 물이 땅을 온통 휩쓸면서 홍수터(홍수 때 물이 머무는 하천변 저지대) 효과가 나타났다. 물이 차는 것이 잠시 멈춘 새를 이들은 놓치지 않았다. 네 사람이 애타게 손을 흔들고 있는 마을회관 옥상으로, 그 다음 청기와 집으로, 마지막으로 저쪽 편 둑 위 안전지대로. 각 지점을 두세 명이 맡아 모든 이를 구조하는 역사를 이룬 것이다. "안 간다고 버티는 노부부가 계셨어요. 죽더라도 여기서 죽겠다고. 할 수 없이 놔두고 건너왔는데 안되겠더라고. 그 분들 어떻게 되는 걸 보고 나면 평생 생각나겠더라고. 그래서 다시 건너가 설득해서 모시고 왔죠."

살다 보면 사람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그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를 관통하는 전면적 삶의 모습이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과장은커녕 별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얘기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런 엄청난 일을 가능케 한 건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주미경 등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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