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셰스쿠 발포명령이 자멸의 “방아쇠”/뉴욕타임스가 엮은 몰락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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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관제데모 분위기 대학생들이 반정으로 바꿔/도주 헬리콥터 총탄맞으며 두번씩이나 착륙/숨겨줬던 농부가 군에 인계
몰락한 루마니아 차우셰스쿠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구랍 17일 텔리비전 화상회의를 통해 전국지방당 간부들에게 직접 발포명령을 내렸으며 이것이 그의 몰락에 가장 큰 전기를 마련했다고 뉴욕타임스가 7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날 루마니아 임시정부가 확보한 차우셰스쿠와 지방당 지도자들과의 텔리비전 화상회의 기록을 입수,이같이 보도했다.
이 보도는 임시정부 관리들의 증언과 구정부 기록을 토대로 차우셰스쿠 몰락과정을 날짜별로 재구성한 것이다.
▲89년 12월15=32만5천명의 도시인 티미시와라시에서 루터교 토케스 목사의 강제전속에 불만을 품은 신도들의 데모가 시작.
이 지역은 독재정부에 협력적인 루마니아 정교회를 이탈,개신교로 개종하는 시민이 많았다. 이날밤 토케스 목사가 정부군에 의해 침실에서 끌려나와 모욕을 당했고 이 소문이 시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다음날인 16일 아침부터 이에 항의하는 신자들의 데모가 시작되고 학생과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반정부 데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진압병력은 진압방망이로 대응해 큰 피해가 없었다.
▲12월17일=차우셰스쿠는 긴급소집된 텔리비전 폐쇄회로 화상회의를 통해 전국 지방당 최고간부들에게 명령 불복자들에 대한 발포명령을 시달했다.
먼저 현지 군사령관인 코만장군에게 차우셰스쿠는 『내 명령을 모든 장교들에게 시달하라. 1시간내에 티미시와라에 질서를 회복하라. 모두 불러 명령을 전달하고 집행하라. 이해했나?』고 지시했다.
이에 코만장군은 『예,서기장 동무.3개 병력이 진입중에 있고 발포명령을 시달했습니다』고 답변했다.
이어 차우셰스쿠는 40개 지역 지방당 최고간부들에게 『이 발포명령이 전국에 적용된다』고 명령하고 『오늘부터 내무장관휘하의 모든 병력,즉 민병ㆍ보안군ㆍ국경 경비대가 전투무기와 실탄을 휴대하고 국가기관이나 공산당 본부 침입자와 상점 무단침입자에 대해 즉각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밤부터 보안군과 육군병력의 발포가 시작되어 티미시와라 지역에서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사살되었다.
▲12월18일=차우셰스쿠는 그의 명령이 수행될것으로 믿고 이란 방문길에 올랐다가 20일 귀국했다.
▲12월20일=차우셰스쿠는 전국 텔리비전 방송을 통해 반정부 데모를 외국기관과 파시스트들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유혈진압을 정당화했다.
차우셰스쿠는 국민들의 자신에 대한 증오심을 깨닫지 못한채 다음날 대규모 친정부 데모를 열것을 지시했다.
이 지시는 엄청난 계산착오였으며 결국 혁명 군중을 스스로 불러 모으는 결과를 빚었다.
▲12월21일=대규모 군중집회는 처음 예전의 집회와 같았다. 지방공장 지도자들이 공장 노동자들을 모아오도록 명령받았으며 수도 부쿠레슈티의 심장인 궁정광장에는 지도자를 찬양하는 플래카드를 든 군중들로 메워졌다.
이곳은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위 본부와 루마니아 전 왕조의 궁전이 있는 곳이다.
차우셰스쿠는 제2인자인 부인 엘레나를 대동한 가운데 군중들에게 티미시와라 지역의 유혈데모를 또다시 비난했다.
이때 인접한 부쿠레슈티 대학의 학생들이 전날 차우셰스쿠의 방송연설을 듣고 유혈진압을 항의하는 방법을 토론하는 사발통문 끝에 대학 교수들을 만나기 위해 학교에 모여들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처음 정부가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군중집회를 여는 것을 몰랐다가 인근 궁정광장에서 흘러나오는 차우셰스쿠의 목소리를 듣고 궁정광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군중 뒤로 스며들어 차우셰스쿠의 유혈진압을 정당화하는 연설에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일부 노동자들이 이에 가세했다.
텔리비전 중계 기술자들이 급히 오디오를 차단하고 효과박수를 내보냈으나 이런 속임수는 이미 너무 늦었다.
차우셰스쿠가 놀라며 연설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텔리비전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수분후 텔리비전 중계는 중단되었다.
이곳에 모인 군중들과 텔리비전을 시청하던 국민들은 차우셰스쿠가 취약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오후엔 부쿠레슈티 중심가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대로 메워졌다. 이는 두번째의 대규모 유혈극을 낳았다.
▲12월22일=이른 아침부터 대규모 군중이 시가지를 휩쓸고 일부 군인들이 독재자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국민편에 서기 시작했다.
이날 낮 12시15분 차우셰스쿠 부부는 공산당 중앙위 건물 옥상에서 작은 흰색 헬기를 타고 도주했다. 이 건물안에서는 구국위가 새정부 구성을 논의하고 있던 때였다.
이륙후 수발의 총탄을 맞은 이 헬기에는 차우셰스쿠 부부외에 3명의 조종사와 경호원 2명 그리고 충성분자인 보좌관 2명이 타고있었다.
중량이 초과된 이 헬기는 도주중 두번 착륙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번은 두 보좌관을 내려놓기 위해서였고 두번째는 조종사들이 도주하는 독재자에게 헬기 폭발 위험을 강조,이를 확신시켰기 때문이었다.
티르고비스테 근처 보테니에 착륙한 차우셰스쿠 부부와 두 보좌관은 빨간색 차를 타고 안전지대를 찾아나섰다.
그들은 얼마가지 못해 인근 침풀룽 마을에서 농민들에 의해 발견되어 피신처로 곡식창고를 제공받았으나 이는 농민들의 함정이었다.
차우셰스쿠 일행은 곧 군병영에 인도되어 25일까지 장갑차에 태워져 티르고비스테 주변 군부대를 전전했다.
▲12월24일=차우셰스쿠에 충성하는 보안군이 살상과 전투를 계속,지방으로까지 전투가 확산되어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날은 또 차우셰스쿠 추종자들이 마침내 그가 억류되어 있는 장소를 알아내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그가 억류되어 있던 군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2월25일=차우셰스쿠 부부는 장갑차에서 끌려나와 특별군법회의에 세워졌다.
두시간동안 계속된 이 군법회의에서 차우셰스쿠는 대학살 등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어 5분후 총살형이 집행되었다.<뉴욕=박준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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