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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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9면에서 계속>
태영 우리 모두 어머니가 빨리 낫길 바래요.
여인 생각이 나는구나. 아마 국민학교 때였지. 너희 둘이 이 에미곁에 서로 누워 자겠다고 떼쓰던 기억들이…하지만 이제 다신이 에미 품에 안져 잠이 들길 원하지 않겠지.
태영 (괴로운듯 돌아선다)
여인 이제 그런건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희들 모두 너무 자라 버렸으니까…. (꿈꾸듯 천천히 일어나 무대 앞으로 나온다)
우리 모두는 다정한 소꿉친구였다. 셋이 모이면 항상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내는 행복한 시절들이었지. 너희 아버지와 그 사람은 언제나 한패가 되어 나를 놀려대곤 했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상상이 되지 않니? 까까머리 두 남자애가 이 에미의 소녀시절에 남아 놀려대는 모습이….
너희 아버지는 언제나 반에서 일등을 하는 모범생에 다가 우리 셋중 가장 부잣집 아들이었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러질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나무를 하러산에 올라가야만 했지. 지금도 생각이 나는구나. 점심시간마다 텅 빈 도시락을 책상위에 올려 놓으며 배가 아프다고 말하던 그 모습 말이다. 어려서부터 줄곧 점심을 거르면서 살아야 될만큼 그사람의 집은 너무도 가난했어. (태영, 여인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듯 등을 돌려 이야기만 듣고 있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부터 너희 아버지와 그 사람에 대한 내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여고에 들어가면서부터 왠지 모르게 자주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태영 (천천히 돌아선다) 그런데 왜 아버지와 결혼하신거죠?
여인 니 아버질 선택한건 모두 다 그 사람이 떠나 버렸기 때문이었어…. (사이) 그리고 그 사람을 십년만에 다시 만났다 (다시 환상에 사로잡혀) 이렇게 비가 오는 어느날 학교 강의실로 나를 찾아왔어. 지금도 그 떨리는 목소리는 잊을 수 없다…. (떨리는 목소리로) 늦지 않았다면 날 다시 찾고 싶다고 말하던 그 사람의 말을… 하지만 이미 난 한 남자의 여자가 되어 있었어. 모든게 운명이었다. 너무도 빨리 내 인생을 결정해 버린거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 듯 눈물을 흘린다)
태영 아버지와 결혼하신 걸 후회하세요.
여인 (눈물을 닦으며) 모두 지난 일이야. 난 니 아버지에게 너무도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왔어.니 아버지가 떠난 것도 그 사람이 친구이기 때문이었어. (돌아서서 태영을 바라보며)용서받고 싶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니 아버지에게 모든걸 용서받고 싶어. (발작적으로 매달리며 그럴 수 있겠니. 지금이라도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겠니. (무너지듯 태영의 팔에 매달려 주저 앉는다)
(사이)
여인 (정신착란을 일으키듯 좀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일어나 태영을 바라보며) 내가 왜이러지.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지. 가엾은 내 아들. 이리 오너라. 너의 두볼을 만져보구 싶구나. (태영 여인에게 다가간다)
여인 (두볼을 어루만지며)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태영 (시선을 허공에 두며 목이 멘듯) 예, 알아요.(태영, 천천히 여인의 몸을 부축해 여인을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간다. 긴사이, 태영이 다시 방으로 돌아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외츨복 차림의 지연이 나온다)
태영 떠나야 겠어. 이젠 더 이상 이 집에 남아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을테니까.
지연 (천천히 소파에 앉으며)…어디로 갈거니?
태영 아직은 정하지 않았어.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된다는 사실이야.
(걸음을 옮기며)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지연 앞에 선다) 어쩌면 누나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 될지도 모르니까 들어줘야 돼.
지연 (태영을 바라본다)
태영 …더 이상 엄마를 괴롭히지 마. 한번의 실수로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오신 분이야.
지연 엄만 어려서부터 나보다 더 너에게 정을 쏟으며 살아오셨어.
태영 난 어려서부터 사고뭉치였지. 까닭없이 나를 멀리하는 아버지와 누나의 그 냉랭한 태도앞에서 그게 그 시절에 나를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유학을 가서도 그랬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왜 나혼자만이 그 낯선땅으로 버려져야 했는지에 대해 말이야….
하지만 이유를 알고 나선. 오히려 마음만은 편하더군….
이유야 어찌됐든 우린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 났잖아! 내가 아버지와 누나를 미워하지 않듯…(생각을 정리하듯 머리를 흔들며)
아니야, 이제 난 아무도 미워하지 않겠어.
생각해보니 난 누구를 미워할 자격도 갖고 태어나지 못한 놈이니까.
지연 (조용하게)그런 말은 우리 모두 할 필요가 없어.(천천히 시선을 마주하며)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사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성순
성순 (다급하게) 와유, 아저씨가 와유.
(아무 반응이 없자) 참말이라니께유. 지가 봤시유.
지연 그게 무슨 말이야?
성순 지가 이 두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께유.
태영 천천히 얘기해봐. 누굴 봤다는 거니?
성순 누군 누구여유 아저씨지유.
태영 아버지를!
성순 그러유, 지가 요앞 큰 길에서 친구를 기다리구 있는디 아저씨가 건너편 큰 길에서 이쪽으로 가고 계시더라구유.
지연 분명히 아버지가 맞니?
성순 (화를 내며) 그럼 지가 거짓말하겠시유.
태영 잘못 본 건 아니야.
성순 (화를 내며)그만둬유. 사람말을 그렇게 못믿고 어떻게 산다여. 지가 배운 것 없어도 두 눈 하고 몸하나 건강해유….
(눈치를 살피며) 참말 오시지 않았시유?
(태영·지연 각자 생각에 빠져 있다)
그럼 참말 이상하네. 집으로 오셨다면 벌써 들어오시구도 남을 시간인데.
태영 (커튼 사이로 창밖을 바라보다 지연을 돌아보며) 성순이 말이 사실이라면이 부근에 계시다는 이야기군.
사이, 무대를 감도는 침묵속에 소리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50대초반의 사내. 모두들 당황한 표정이다.
사내 (들어서며) 오래간만이구나. 니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자에 앉는다) 왜 모두들 그렇게 서 있지?
내가 못올데라도 온거냐?
성순 (앞으로 나서며)아니여유. 지는 아저씨를 봤구먼유. 요앞 큰 길에서 말이여유.
사내 그래 성순이도 잘 지냈니?
성순 야, 지야 늘 잘지내지유.
사내 (노인을 바라보며)주무시는 모양이구나?
지연 조금전에 잠이 드셨어요.(사이)
사내 (담배를 꺼내 피운다) 내가 온게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나.
태영 아니오. 잘 오셨어요
사내 술을 한잔하고 싶구나. 한잔 주겠니.
성순 그라지유. (부엌으로 퇴장한다)
사내 그리들 앉거라.
(태영, 사내앞에 마주 앉는다)
니 에미는?
지연 주무세요…아주 돌아오신건가요?
사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너는 변한게 없구나. (담배를 꺼내 피운다) 어려서부터 니에미를 가장 많이 닯았지. 그 차가운 말투부터 말이다.(사이)
지연 죄송해요.
사내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난 니 에밀 좋아했으니까. (사이, 간단한 술상을 차려 나오던 성순, 가방을 보며)
성순 이건 무슨 가방이래유? (성순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다)
태영 지금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사내 (천천히 태영을 바라보며) 어디로 말이냐?
태영 정한데 없습니다.
사내 (잔을 채우며) 그럼 떠나지 마라.
테영 (사내를 바라본다) 어머닐 이제 용서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사내 내겐 누구도 용서할만한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제 그런 이야긴 그만하기로 하자.
이제 좀 쉬고 싶구나. 너무도 오랜 세월을 떠돌아 다녔다. (술잔을 비운다)
사이, 초인종 소리
성순 이 시간에 누구래여. (시계를 바라보며) 이젠 찾아올 사람도 없는디?
사내 어서 문을 열어줘라. (밖으로 나간다)
사이,
방안에 약간의 침묵이 감도는데 성순을 따라 들어서는 건강한 체구의 사내들
성순 (떨리는 목소리로) 이 사람들이 경원에서 나왔다는디유.
지연 (사내를 바라본다) 내가 연락했다….
사내1 환자는 어디있습니까?
사내 잠깐 앉으시오.
사내2 아닙니다. 저흰 환자를 데리고 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이, 무거운 침묵
사내 (다시 잔을 채우며) 성순아, 그분들을 지하실로 안내해라.
지연 안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사내1, 2를 향해)집을 잘못찾아 왔어요. 우리집엔 당신들이 찾는 그런 사람은 없어요.
사내 (조용하게) 이제 그만 니어머니를 놓아주자.
사이, 성순을 따라 지하실로 퇴장하는 사내1, 2
지연 아버지! (사내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낀다)사이, 비명소리와 함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뛰어들어오는 성순.
성순 (울먹이며) 사모님이…사모님이‥·.
모두들 표정이 굳어지는 가운데 서서히 어두워지는 무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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