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⑧ 소설 - 윤성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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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독특한 성장소설을 하나 쓰고 싶었어요. 멋지게 가출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길을 찾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17쪽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지만 아주 긴 이야기처럼 읽힌다. 짧은 문장에 엄청난 세월을 담아낸 속도감 때문이다.

'다음해에도 같은 편지가 도착했다. 그 다음해에도 같은 편지가 도착했다. 생일 선물을 잘 받았고, 자기가 이제는 몇 살이 되었고, 무엇을 할 줄 아는지. 해마다 편지는 조금씩 길어졌다.'

그의 단편은 다른 후보작에 비해서도 짧은 편이다. 실제로 퇴고할 때마다 분량이 줄어든다고 했다. 마구 줄이는 건 아니었다. 그는 "1분짜리 이야기를 원고지 80장에 쓰고, 59분짜리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끊는다는 느낌으로 생략한다"고 했다. 생략을 통해 이야기의 리듬감을 찾는 것이다. 신수정 예심위원은 "처절한 생략과 압축, 두 문장으로 하나의 서사를 해내는 경제성이 있다"며 "구성의 묘미와 기술적 세련미는 최고"라고 평했다.

윤성희식으로 에둘러 말하는 화법은, 표현 하나하나를 상징으로 바꿔놓는다. '그는 코스모스 잎을 따왔다. 그러고는 손톱으로 꽃잎을 꾹 눌러 자국을 만들었다. 분홍색은 아슬아슬한 빛깔을 가지고 있어요. 여장남자는 손톱에 눌린 코스모스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넘어왔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길 바라는 것, 여성적인 화법이다. 그래서인지 여성독자가 그의 작품을 더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단다.

따뜻하면서 썰렁한 윤성희식 유머도 압권이다. 편지에 쓰인 주소를 찾아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나섰다 한참만에 돌아온 주인공이 '실종 신고도 안 하냐?'고 내뱉자, 비빔국수를 먹고 있던 식구들이 '이리 와. 국수나 먹어'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의 초기 소설엔 유머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주인공을 딱 한 번만 웃게 해줘야지'란 생각이 들었단다. 그리고 가장 슬픈 건, 유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마당일까. 그런 마당을 떠나면서 주인공은 왜 집주인 여자에게 살아있는 듯이 보이는 모자이크 타일 담장을 만들어줬을까. 작가는 "마당은 어린 시절에 머물고픈 마음과 성장하고픈 욕망의 간극을 조절하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타일 담장은 "선물"이란다.

"그래도 주인공이 한참을 곁에서 살았는데…. 집주인에게 근사한 이별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요. 그러면 언젠가 그녀가 자기 마당에도 무언가를 키우지 않을까하는 바람도 있고요."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내는 기분으로 소설을 읽었다. 늘 에둘러 표현하고 줄여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설명은 의외로 소박했다.

"그냥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친한 이가 무릎 한번 만져주고 가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어요."

글=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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