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막판 툭 불거진 내홍|박 대표 충격발언-한밤사퇴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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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공 청산의 마무리단계에서 박준규 민정당대표위원의 정계 개편발언이 당내에 새로운 충격을 던지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박 대표의 사퇴의사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급한 불은 껐지만 청산정국을 이끌어오며 깊어진 당내세력간 불신의 골이 심상치 않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으며 내년에 본격 전개될 정계개편을 둘러싼 여권내의 전초전이 시작된 느낌이다.
사건의 발단은 박 대표가 28일 모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민정당 해체설」과 「노태우 대통령의 탈당설」을 흘린 데서 비롯.
박 대표는 이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은 현재의 4당 가운데 어느 당에 대해서도 고정관념을 가지지 말라는 뜻을 갖고있다』며 『민정당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굳이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해체설」「탈당설」로 확대 해석, 보도되자 당내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각 지구당에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항의전화가 빗발 쳤을 뿐 아니라 특히 오한구·김용태 의원 등 정호용 의원을 지지했던 TK(대구·경북) 의원들은 의원회관에서 모여 박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을 문제삼고 나섰고 이종찬 전 사무총장도 이에 가세.
오 의원과 이 의원은 정 의원 문병차 군 통합 병원에 들렀다 마주쳐 이를 문제삼기로 하고 이한구 사무총장에게 『명백한 해당행위 아니냐』며 『정 의원의 사퇴대가가 뭐냐』고 항의하는 한편 박 대표의 해명과 징계를 위한 의총소집을 강력히 요구했다.
박 대표의 발언이 의외로 큰 파문을 일으키며 연내 5공 청산을 위해 어렵게 다듬어놓은 구도까지 흐트러 버릴 가능성을 보이자 이춘구 총장 방에 이한동 총무·손주환 기조실장 등이 모여 긴급대책을 논의한 끝에 긴급당직자회의를 소집.
오후4시 20분쯤 대표위원 실에는 이 총장·이 총무·손 실장 외 채문식·유학성 고문, 이승윤 정책의장, 박희태 대변인, 이긍규 부대변인, 최재욱 대표위원보좌역 등이 모였고 이 총장은 『정계개편발언 이후 각 지구당에서 심한 항의전화가 빗발치고 있다』며 발언의도를 밝힐 것을 요구하며 『어렵게 마무리 해놨는데 정 의원 측 반응이 심상치 않다』며 심하게 몰아붙였다는 후문.
박 대표는 ▲노 대통령의 탈당 설은 언급한바 없고 ▲민정당 해체 설은 대통령의 「중립」입장을 확대 해석했으며 ▲양당제는 대통령제일 때의 일반론을 얘기한 것이라고 해명.
박 대표는 입원중인 정 의원을 방문, 『진의가 잘못 전달됐으며 결코 정 의원의 희생으로 다른 일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다』고 해명했는데 오한구 의원은 『해체할 정당에서 뭘 사퇴하라 말라하느냐』고 몰아세웠다는 것.
박 대표는 『당과 총재를 위한다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퇴하겠다』는 정 의원의 언질을 받고 당으로 돌아와 오후 5시30분쯤 다시 당직자회의를 계속.
박 대표는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의사를 밝히고 곧이어 이 총장·이 총무와 별도 구수 회의를 가진 뒤 이 총장을 통해 사퇴 서를 홍성철 청와대비서실장에게 전달.
그러나 의원들이 29일 아침 별도의 모임을 갖고 조직적 반발을 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이춘구 사무총장은 25일 저녁 삼청동 안가에서 최창윤 정무수석 등과 박 대표의 사퇴문제 등 진화 대책을 숙의.
노태우 대통령 밤늦게 최 수석으로부터 이 같은 사태를 보고 받고 『하필 이 같은 시기에 뚱딴지같은 말을 하다니』라고 대단히 격노해 사표수리 방침을 밝혔고 홍 실장이 이를 박 대표에게 전달하자 박 대표는 즉시 오후 10시30분쯤 최재욱 보좌 역을 통해 사퇴성명서를 각 언론사에 전달하고는 29일 새벽 보도진을 피해 시내 모 호텔로 잠적했다.
노 대통령은 29일 오전 박 대표의 사표를 받아들여 수리했으나 후속인사를 어떻게 할지 결심이 서지 않은 상태여서 어차피 연말은 넘기고 빨라야 연초에나 후속인사가 있게될 전망.
최창윤 정무수석은 『사표를 받는다는 방침이외에는 확정된 것이 없는 상태』라면서 『정 의원 사퇴와 증언이 남아있어 연말은 대표의 공백상태로 넘어갈 것이 확실하다』고만 답변.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국회증언과 사퇴 등이 순조롭게 끝나 후유증이 없을 경우 노 대통령은 의외로 당정개편을 앞당겨 분위기를 쇄신할 수도 있다』며 연초의 대대적인 당정 개편 가능성을 점치면서 『이번 신정연휴 때 구체적인 구상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
노 대통령은 당내에 마땅한 후임인사가 없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박태준 의원·유학성 국방위원장·김윤환 전 총무·이춘구 사무총장 등이 가능한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으며 당 외 인사를 영입할 경우 이원경 주일대사·강영훈 총리 등도 물망.
박 대표 전격사퇴의 직접적인 원인은 정호용 의원 측의 반발이지만 실제는 민정당 밑바닥에 감춰져있는, 정계개편의 장기구도를 둘러싼 갈등과 암투가 표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박 대표는 김재순 국회의장·김윤환 전 총무 등 구 공화출신의 6공신주류와 함께 보수연합 식 개편을 추진해온 게 사실.
박 대표나 이들 신주류들은 헤쳐 모여 식의 보수대연합론을 들먹이며 『민정당의 기득권을 고수할 생각이 없다』 『대권주자가 없으면 외부에서 영입할 수도 있다』면서 공화·민주당 측에 접근했는데 이들은 김영삼·김종필 총재와도 접촉해 개편에 대한 의견교환을 상당히 진지하게 나누기도 했다는 것.
지난해 12월 이종찬 사무총장이 당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도 이 총장이 신주류 파가 공화당과 합작하려는 낌새를 눈치채고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풀이.
따라서 이번 박 대표 경질은 공화 또는 민주-공화와 합작을 추진하려는 신주류 측과 이런 개편을 반대하는 이종찬 의원 세력 등과의 제2라운드 충돌인 셈.
거기에다 민정 당 핵심부나 청와대측은 인위적인 보수대연합보다는 민정-평민 당을 주축으로 하는 정국안정관계 유지에 더 관심을 쏟으며 내각제개헌을 통한 개편가능성을 보고 있어 노 총재의 당내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신주류 측의 의도와는 부딪치게 되어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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