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⑦ 시 - 문정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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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 된 전수안 대법관은 지난달 취임사 말미에서 문정희 시인의 시 '먼길'을 낭독했다. 그 어떤 글이 여성으로서 대법관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까. 등단 37년째, 시인이야말로 '먼길'을 걸어왔다.

김수이 예심위원은 "시인은 시적 열정을 평생 고르게 유지하면서 여전히 뜨겁게 쏟아붓고 있다"고 말했다.

시인은 읽고 쓰는 생활에 모든 삶을 투자했다. 그러다 숨 막히고 답보 상태에 빠지면 외국에 나가 자극을 받은 뒤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이제 "굳이 내 몸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충만하다"고 했다. 자식 같은 시들이 대신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곧 독일에서 4권 전집 분량의 시집이 나온다. 미국에서도 두 번째 영역 시집이 나온다. 2004년 뉴욕에서 영역 시집 'Wildflower'를 발간한 뒤 그녀의 시는 각국 언어로 번역돼 읽혔다.

우리에겐 황무지와 다를 바 없는 해외 문단에 그가 나서면 늘 한국 최초가 된다. 외국을 펄펄 날아다니는 유능한 시인. 그러나 깊이 패인 상처도 있다. 40대 때 여성의 상징인 자궁과 유방 일부를 절제했다.

'뱀의 비늘같이 차가운 면도날이/스웃스웃/지나간 후/나는 털 없는 여자가 되었다'('거웃'에서)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가장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는 거웃을 깎이던 순간, 시인도 여자도 어머니도 아니었다. 그저 '몸서리친 한 덩어리 고기'였을 뿐.

시인은 10~20년 전의 경험을 이제 와서야 손에 잡힐 듯 묘사한다. 그는 "너무 바닥으로 가면 언어가 다 달아나더라"고 했다.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가 부질없고 부정확해서 못 쓰겠더라"고도 했다. 수술 뒤에 몸의 균형도 무너졌다. 통증이 오는 허리에 넓적한 복대를 두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전투하듯 시를 썼다.

10년, 20년이 지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패인 가슴에 살이 올랐다. 아픈 허리도 말끔히 나았다. 시인은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줄 알았는데, 몸이 회복되자 정신이 회복됐다"고 했다. 비로소 처절한 몸부림은 시로 태어났다. 생명을 낳던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어미는 피묻은 한 마리 짐승이었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하늘이 뒤집히는/날카로운 공포'('탯줄'에서)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탯줄을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고 당당히 말한다. 같은 이유로 여성으로서 수십 년을 감내한 결혼 제도를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살짝 비틀어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다.

완성한 시도 한참 묵힌 뒤 발표할 때가 많다고 했다. 오래 품고 있으면서 익히고 보완하기도 하고, 묻어두고 혼자 보며 즐기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절로 성숙해 내보내도 되겠다 싶은 시도 있단다. 이렇게 시인은 생명을 낳듯 시를 낳는다. 시인의 자궁에선 지금 80여 편의 시가 문 열리길 기다리며 발가락을 꼬물거리고 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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