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고이즈미를 위한 역사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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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올해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고집은 최근 몇 년간 일본과 주변국들의 관계를 악화시켜 왔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일본 총리와는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일본 내에서조차 고이즈미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일본인 다수는 중국이 이 문제로 분노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지지하지 않는다. 7명의 전직 총리가 그에게 참배를 그만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차기 총리가 유력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도 총리가 되면 야스쿠니를 참배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은 일왕의 야스쿠니 참배를 요구했다. 야스쿠니를 둘러싼 갈등은 앞으로도 더 깊어질 것 같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야스쿠니 문제에서조차 긍정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 때를 떠올려 보자. 나카소네와 고이즈미는 둘 다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오랜 기간 총리직에 머물렀고, 성향은 보수적이자 민족주의적이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들이 친미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나카소네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세계에서 일본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 돼야 한다고 말했고, 고이즈미는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야스쿠니 문제와 대중국 관계다. 나카소네는 재임 중이던 1985년 야스쿠니를 방문했다. 그는 특히 방문 날짜로 8월 15일을 택함으로써 금기를 깼다. 중국은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다. 학생들은 그의 방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양국 관계는 얼어붙었다.

나카소네는 그러나 중국의 반발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는 야스쿠니에 가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이듬해 중국 공산당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의 초청으로 베이징을 찾았다. 그리고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위한 중일 청년교류센터 설립의 주춧돌을 놓았다.

이는 중국 지도자들이 자국 내 반일 감정을 제어하는 데 도움을 줬다. 후야오방은 나카소네의 용기를 높이 사며 중국 젊은이들에게 자국만을 생각하는 것은 분별 있는 애국자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나카소네는 이후 중국과의 외교에 있어 유능한 정치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가 (일본을 중국에) '팔아넘겼다'는 비난은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고이즈미식의 강경노선만이 유일한 해법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총리는 주변국들에 대한 자국 내의 적개심을 이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또 중국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보수.애국.친미적일 수 있다. 실제로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방문을 그만뒀다면 이는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중.일 정상회담을 여는 문이 될 수 있었다. 일본과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중국 내의 온건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었다.

불행히도 고이즈미와 동료들은 앞으로 나갈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아소 외상은 "중국이 (참배하지 말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가지 않을 수 없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 더 피우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까지 했다.

지금 중.일 지도자들이 20여 년 전 후야오방과 나카소네처럼 포옹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접한 두 강대국 정상들이 국제회의에서조차 서로 못 본 척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만약 지금 나카소네가 아소의 말에 답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이즈미가 피우는 담배를 간접흡연하는 것은 일본의 국익이 아니다."

장원란 캐나다 앨버타대 정치학부 부교수

정리=김선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