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종합과학관 C동에서 정우진(左).창동신(右) 교수가 대학원생들과 단백질 정제 실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태성 기자
1990년대까지 이화여대는 자연과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기초분야에선 더욱 그랬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네이처.사이언스.셀 등 세계적 학술지에 등재했다는 소식도 속속 전해지고 있다. 특히 생명과학(BT)이나 나노과학(NT) 쪽이 활발하다. 학계에선 "여성의 섬세함으로 첨단 과학을 선도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 스타 과학자의 채용=97년 가을 한 심포지엄장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이서구 박사를 이화여대 교수들이 보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박사는 당시 과학기술부 등이 노벨상에 근접한 과학자 중 한 명으로 꼽은, 세포 신호전달 분야에선 세계 최고의 권위자였다. 일면식도 없던 이대 교수들은 다짜고짜 "이대로 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 박사는 당시 "이상한 소리"라고 넘겼다.
그러나 이듬해 이 박사는 석좌교수 직을 받아들였다. 2004년 영구 귀국했다. 당시 미국 동료 과학자들이 이 교수에게 "사이언스를 접었니"라고 물을 정도로 과학계에서 이대는 '무명'이었다.
당시 총장이던 장상 민주당 공동대표는 이서구 교수의 스카우트에 대해 "이대가 종합대학으로 크려면 자연과학도 강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며 "결국 대학은 교수에 의해 결정나는 만큼 세계적 인물을 스카우트하기로 하고 공을 많이 들였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교수 채용 등 연구에 대해선 전권을 보장받았다. 이 방침은 신인령(2002~2006) 총장을 거쳐 이배용 현 총장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 선택과 집중=이 교수는 이대에 와 세포 신호전달 분야를 육성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이 교수의 NIH 네트워크도 활용했다. 99년 NIH에 이화여대와 공동연구실인 세포 신호전달 공동연구실을 만들었다. 그는 세포 신호전달 분야의 교수만 7명을 채용했다. 교수 승진심사 때 논문 업적 기준을 강화했다.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SCI)의 상위 20%급 논문에 교신 저자로 한 편 또는 두 편 이상 내야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다른 논문에 인용되는 횟수(IF)도 승진의 중요 변수로 삼았다.
이런 노력은 점차 결실을 보고 있다. 이 교수가 처음 왔을 때는 미국 생화학회지(JBC) 급에 논문을 낸 교수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BT 분야에서 교수 18명이 SCI급에 53편을 발표했다. 이 교수팀은 우수연구센터(SRC.98년), BK 21(99년), 국가핵심연구센터(NCRC.2006년) 등으로 지정됐다. 연구비도 매년 늘어 지난해 연간 83억원이나 됐다. 대학원생도 몰렸다.
이 연구처장은 "예전 평가 때 우리가 1등을 하면 '왜 이대가 1등 하느냐'고 했던 사람들이 이젠 '1등 할 만하다'고 바뀌었다"고 전했다.
이대는 이 같은 전략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하고 있다. NT 분야에선 서울대 최진호 교수를 석좌교수로 영입했다. 서울대 최재천 교수를 스카우트한 것도 같은 이유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