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열기의 현장을 가다 - 가난만 남긴 당의 탁상행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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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시장경제의 원리는 아주 간단한 것―. 수많은 동독시민들이 서베를린에 첫발을 들여놓으며 체험한 사실이다. 계획경제 밑에서 모든 물가가 수급관계에 아랑곳이 「안정」된 경제에 익숙한 그들은 바나나를 사려고 몰려들었을 때 수요가 폭발적이 되자 값이 오르는 이치를 처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수요와 공급원칙에 따라 물건가격이 형성된다는 것을 처음 배우게된 것이다.
『동독건국 40년동안 우리는 헛된 일만 해왔다.』 11월 하순의 토요일 서베를린의 밤거리에서 만난 30대부부의 말이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 여섯살짜리 딸아이의 손을 잡고 을씨년스런 표정으로 휘황한 쇼윈도를 구경하던 젊은 부부였다.
평상시면 비어있을 새벽1시쯤 서베를린의 중심번화가인 쿠담거리에는 륙색을 둘러맨 젊은이들, 비닐백을 손에 든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쇼윈도의 물건들을 기웃거리는 동독시민들은 이렇게 자본주의사회의 실체를 추운 밤거리에서 처음으로 1백마르크의 서독화폐가 들어있는 호주머니를 가지고 체험했다.
환영금조로 서독정부에서 지급한 1백마르크로 동독시민들이 가장 욕심을 부리며 사들인 물건이 바나나 등의 과일과 코피―. 그래서 서베를린의 슈퍼마킷에서는 한때 이런 물건들이 동이 날 정도였다.

<과일류·코피 동나>
다음날인 일요일 동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과 빛나는 성과를 대규모집회와 퍼레이드로 과시하던 광장의 한 모퉁이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비밀경찰 해체하라』 『공산당 있는 한 개혁도 의심』 『자유·평등·복지』 『사회주의대신 사회민주주의를』등 갖가지 플래카드와 피킷을 든 시민들이 집회를 마치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행진해 갔다.
시위에 참가한 40대중반의 남자에게 서베를린에 갔다왔느냐고 물었다.
『보고 왔다.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동독사회주의 40년은 내 생애 40년이다. 지금 40이 되어 나는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건축기사 직업을 가진 그는 이제 국가의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며 『현재와 같은 구조로는 사회주의 국가를 절대로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0년간 「물 속에서 머리만 내놓고 있는 것처럼」 근근히 살아오느라고 정치지도자들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똑같은 생각을 가진 똑같은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변화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시위에 나섰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동독시민들의 일반적인 불만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되고 있었다.
가장 큰 불만이 생활필수품 등의 물자부족, 지도층의 부패, 여행제한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물자부족을 가져온 궁핍의 경제는 서독왕래가 자유화되어 서독과의 격차를 직접 실감하고 난 뒤 가장 큰 불만의 요소가 되고 있었다.
아직도 2차대전당시의 자동차엔진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 나라, 전화 한 대 놓으려면 10년을 기다려야 하는 나라가 동독이라고 그들은 불평했다.
동독은 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10대공업국의 하나로 지목돼 왔었다. 그러나 10대공업국의 긍지를 더이상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동독헌법 제9조의 『독일민주주의 공화국의 인민경제는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라는 원칙과 스탈린주의적 관료체제가 종합되어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기업체인 콤비나트가 동독에는 2백24개나 있다. 이 콤비나트산하에 3천5백26개의공장이 동독의 제조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중 한때 독일시계공업의 대명사로 불리던 줄라라는 이름의 공장의 경우 최근에는 서독의 염가물건을 파는 통신판매회사에 납품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회사에서 직접 만들어내는 것은 시계케이스일 뿐 나머지 부속은 홍콩이나 대만 등에서 수입하고있다.

<당 간부 부패폭로>
비단 동독뿐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계획경제의 결과를 서독슈피겔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계획경제는 기술혁신을 가로막고 개인의 창의성을 말살했으며 노동의욕을 마비시켰다.』
시위현장에서 만난 건축기사도 『사회주의 건설과 함께 모든 시민적 가치관이 상실됐다. 우리들은 사회주의적인 모럴도, 시민적 모럴도, 아무런 모럴도 갖고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한 모럴의 상실은 이미 지도층에서 움튼 것이었다. 상징적으로 그런 것을 보여준 것이 지난2일 동독 국회에서의 고위공직자 비리조사결과 발표였다. 호네커 전 공산당 당수 등 당·국가 고위관리들의 호화생활과 부정을 밝히는 국회의사당 모습을 독일신문들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모든 것이 폭로되자 공산당소속 의원들의 얼굴은 새빨개지고 분노로 일그러졌다. 여성의원들은 흐느껴 울었고 남성의원들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 모든 것이 국민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호네커가 늘 강조하며 저지른 일이다.』
반틀리츠라는 특별주거지역에서 외국의 고급제품만 사용한 사실, 그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전용상점의 존재가 폭로되면서 모든 국민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밀보다 싼 빵값>
국민의 생활은 그와는 정반대로 궁핍했기 때문이다.
국영식당에서는 통조림따개를 주문한지 몇해가 넘도록 공급되지 않아 망치와 칼로 열 수밖에 없는 사회, 중앙난방식 아파트를 지어놓고 순환용 모터가 없어 추운 겨울을 지내야하는 사회가 그들 지도자들이 자랑해온 사회주의천국이었던 것이다.
동독의 계획경제가 실패한 대표적인 예를 동독청년동맹(FDJ)의 융에 벨트(젊은이의 세계)지는 최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982년 콘크리트판재 생산을 로봇을 이용해 자동화하기로 결정했다. 5년후 아직 연구도 끝나지 않은 로봇을 생산하도록 건설부가 지시했다. 87년의 건설박람회에 전시하라는 명령이었다. 노동력을 아끼기 위해 만든 이 로봇을 사용하는데 두 사람의 전문인력이 동원됐다. 비능률적이고 예산만 낭비하는 이 로봇은 지시에 따라 건설박람회에 전시됐다. 결점이라면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로봇공장은 올해 5월부터 9월 사이에 건설부의 지시에 따라 이 쓸모없는 로봇을 대량 생산했다.
이 「새로운」기계 때문에 국가경제가 좀먹어들지만 생산자나 입안자나 모두 계획된 목표만 달성하면 그런 것은 신경 쓸 일이 못되는 것이었다.
생산계획뿐 아니라 빵값, 집세에서 꽃값까지 국가에서 결정하고 국가예산으로 가격을 조절하기 때문에 이런 일도 있었다.
한때 빵값이 곡물값보다 싼 적이 있었다. 빵값을 국고에서 보조, 싸게 공급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닭 모이로 빵을 사용했다는 얘기다.
로봇의 예에서 보듯 새롭고 비싼 기계가 있더라도 노동을 절약하고 생산성을 높이는데 투입하기보다는 관료의 탁상계획에 따라 설치되는 예가 허다하다고 서독신문들은 보도하고 있다.
당과 정부관리의 탁상에서 계획되고 실행되는 이 허구의 결과는 국민의 생활에 직접적 현실로 연결되고 있다.
『9년째 박물관의 영선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직장에서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최근 새로 기계 두 대가 들어왔는데 헌 것보다 훨씬 못해요. 헌 기계들은 모두 40년 전에 만든 것들이죠. 그런걸 가지고 일의 능률이 오르겠어요.』
세 아이의 아버지라는 39세의 이 남자는 한달에 1천1백마르크의 봉급을 받는다고 했다. 부인과 5식구의 가장으로 간신히 먹고사는데 급급할 뿐 다른데 신경 쓸 게제가 못된다고 투덜거렸다.

<"세상이 미쳤지">
『조그만 버터 한 조각에 3마르크가 넘는데 세상이 미쳤지….』 그러면서 그는 동베를린은 그래도 물건공급이 나은 편이라고 했다. 라이프치히라든가 드레스덴 같은 데는 박람회 등의 큰 행사가 있을 때 물건공급이 좀 나을 뿐이라며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이 먼저 봉기한 것도 이해된다며 『노동자들은 먹을게 없으면 뛰어나오게 마련이다』고 말했다.
동독의 평균임금도 역시 노동의 질이나 양, 생산성과 관계없이 당에서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결정하고 있다. 대학교수는 다른 동구와는 달리 높은 편으로 2천마르크, 일반노동자가 1천1백마르크에서 1천3백마르크를 받고있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적게 받는다는 이 봉급으로도 살 물건이 없다는 불평이었다.
설혹 쓸만한 물건이 있더라도 상점에서 연줄연줄 통해 아는 사람에게만 팔거나, 서독화폐를 가진 사람에게만 파는 부패와 암시장이 있다고 했다.
하다못해 꽃다발을 선물하려 해도 테이블 밑에 숨겼다가 서독 마르크화를 내는 사람에게만 판다는 얘기였다.
한 동베를린시민은 독일민주주의 공화국의 약자인「DDR」를 가리켜 『어떤 말로도 DDR를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민주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회와 비교한다면 모든 것이 한결같은 사회라고나 할수 있을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글 김동수 부국장
진창욱 차장
사진 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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