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 격변하는 정치상황서 영욕 엇갈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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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0년대 방송은 엄청난 격동기를 헤쳐왔다.
방송에 있어서 80년대 초·중반은 오욕의 역사였으며 87년 민주화운동과 6·29선언 이후는 명예회복의 전환기다.
80년11월 방송사 강제통폐합은 권력의 방송장악으로 이후의 방송이 「권력의 시녀」이기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를 창출했다.
상업방송인 동양방송(TBC)과 동아방송(DBS), 서해방송(SBB), 전일방송(VOC), 한국FM등 5개 방송이 KBS로 통폐합됐으며 독립법인체였던 MBC지방사들이 서울MBC계열사로 통합되었다. 유일한 라디오방송으로 남은 기독교방송(CBS)은 보도와 광고기능이 박탈당한 채 순수선교방송으로 그늘에 가려졌다.
명목상 KBS와 MBC의 양대 방송에 의한 공영방송체제가 확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공영」이란 이름하에 정부에 의한 방송독점구조가 완비된 것이다.
KBS가 전액 정부출자의 정부투자기관으로 MBC주식의 70%를 차지하게됨에 따라 방송전체가 정권의 홍보기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인 9시뉴스 시작 시보직후 머리기사로 항상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정이 보도되었던 것을 『땡! 전‥‥』또는 『뚜뚜뚜―전‥‥』뉴스라고 비꼬았던 것은 5공하 왜곡보도를 웅변해주고 있다.
그리고 언론기본법하의 방송계에서 돈줄을 틀어쥐고 방송사의 순종을 강요한 것이 방송광고공사제도였다. 「한국방송 광고공사법」에 따라 모든 방송광고는 방송광고공사가 대행하고 광고료 중 20%를 리베이트로 차지했다.
광고공사는 20%중 광고제작비로 10%가량을 광고사에 주고 나머지 중 자체경비를 제외한 대부분을 「공익자금」이란 형태로 조성해 문공부가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환경 속에서도 컬러방송 실시 등 제작기술측면의 발전은 꾸준히 이어졌다.
80년12월 실시된 컬러방송으로 시청자들은 화려하고 사실감 넘치는 방송을 접하게 되었으며 방송프로그램 자체의 질적 수준도 향상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인 것은 다큐멘터리분야로 『한국의 나비』 『야생화의 사계』등은 아름다운 생태계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었다.
반면 쇼·오락프로그램은 지나치게 화려한 조명과 의상 등으로 과소비를 부채질하는 역기능을 낳기도 했다.
80년대 방송중 가장 돋보이는 프로그램은 무엇보다도 『이산가족 찾기』였다 .83년 6·25특집기획으로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는 장장 6개월에 걸친 생방송기록을 수립하며 매스미디어로서 TV의 막중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진정한 보도기능을 상실한 방송은 전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86년2월 기독교단체로부터 시작된 시청료 거부운동은 재야단체의 조직적인 지원과 전국민적 호응에 따라 KBS자체재정을 격감시켰을 뿐 아니라 크게는 5공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이어져 87년 민주화운동의 전조가 되기도 했다.
87년 민주화운동과 6·29선언은 방송에도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방송민주화운동은 방송사노조의 탄생과 함께 본격화됐다. 87년7월16일 MBC에서 「방송민주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뒤이어 l2월9일 방송사상 최초로 MBC노조가 창립되었다. 88년5월20일에는 KBS노조도 만들어져 방송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방송민주화운동이 시작되면서 87년말 대통령후보들의 TV선거연설이 가능하였고 88년11월에는 국회청문회가 생중계되는 등 방송의 정치적 기능이 발휘되었다.
방송프로그램의 민주화도 급속히 진전되어 89년2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가족의 얘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와 『광주는 말한다』가 방송됐으며, 방송소재의 확대로 재벌의 정경유착을 풍자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병영생활을 다룬 『동작 그만』이 코미디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 88올림픽중계방송은 방송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우리의 방송기술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KBS는 주관방송사로서 최첨단 장비를 구입해 국제수준의 질 좋은 영상과 음향을 위성을 통해 각국에 내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선진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한편 87년11월10일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같은 달 28일 새 방송법이 공표됨으로써 방송민주화가 제도적으로 정착하게 됐다. 그러나 이 법에 따라 방송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새로운 방송규제기관으로 방송위원회가 탄생했지만 새 방송법이 언론기본법 폐지와 함께 성급히 제정되어 많은 결함이 드러나고 있다.
기존의 독과점 방송체제와 방송광고공사의 광고독점, 공익자금의 온존 등은 시급히 개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어두운 과거를 갖고있는 방송은 방송민주화와 함께 전환기를 맞고있다.
최근 논의가 활성화되고있는 새 방송법 제정과 방송인들의 의식개선노력 등은 이제 90년대의 과제로 남게됐다.
또한 기술적인 면에서도 방송은 뉴미디어인 CATV, 위성방송, HDTV(고화질TV)라는 벅찬 과제를 안고있다.
내년 시험실시를 앞둔 CATV와 96년 예정인 위성발사 등 하드웨어의 발전에 따른 소프트웨어(방송프로그램 내용)의 개발·공급도 큰 숙제다.

<80년대 방송계 일지>
▲80년7월=언론인 집단해직사태. 5공청산의 산파역 국보위가 「사회정화」명목으로 수백명의 언론인 「숙청」.
▲80년11월=방송사 통폐합. 14일 방송협회의 「건전언론육성 창달에 관한 결의문」채택으로 자율형식의 강제통폐합 시작.
▲80년12월=컬러방송 시작. KBS lTV가 1일 시험방송 시작, 22일 KBS 2TV와 MBC도 본격컬러방송.
▲80년12월26일=언론기본법 제정.
▲81년3월=KBS광고방송 시작.
▲81년5월25일=아침방송 부활.
▲83년6월30일=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방송, 11월까지 계속됨.
▲86년2월=시청료거부운동 시작. 기독교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돼 전국민운동으로 확산.
▲87년11월28일=새 방송법 공표.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새 법에 따라 권한이 강화된 새 방송위원회 등장.
▲87년12월9일=방송사상 최초로 MBC노조 탄생·88년5월 KBS도 노조결성.
▲88년9월17일=서울올림픽 전세계중계, 방송기술도약의 계기.
▲88년11월=국회청문회 생중계방송.
▲89년4월=방송구조 개편연구를 위한 「방송제도연구위원회」발족.
▲89년6월5일=대통령 주례 라디오방송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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