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대목 극장가 방화 "실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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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연말연시 극장가에 한국영화가 단 1편도 안 걸린다. 연중최고의 흥행대목인 연말연시에 한국영화가 전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추석을 전후해 『불의 나라』『그후로도 오랫동안』등의 흥행성공으로 한국영화의 소생가능성이 반짝 비쳤지만 석달도 못가 글자 그대로 반짝하고 만 꼴이 됐다.
돈을 버는 게 제일목적인 극장측을 나무랄 수만도 없는 것이 걸고싶어도 걸만한 한국영화가 없는데 문제가 있다.
1백4개사나 임립한 영화사중 그런 대로 공들여 한국영화를 만드는 곳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거개의 영화사는 연 1편인 의무제작편수나 채울 요량으로 엄벙뗑하게 만들어놓고 입을 다물어 왔었다.
고전해학극이니, 인신매매를 고발하는 사회물이니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내용은 거의 포르노와 다름없는 저질을 양산했었다.
극장측도 이런 영화를 스크린쿼타나 때울 심산으로 비수기 등에 후닥닥 상영한 경우가 많았다.
이 통에 연중관람객이 가장 많은 연말연시 대목엔 보여줄 만한 한국영화가 1편도 없는 비극이 연출돼버렸다.
큰 장을 세우고 매년 저절로 찾아오는 잔치판에 객들만 흥청거리는 꼴이 된 것이다.
영화계는 이처럼 올 연말대목의 한국영화 전무현상에 대해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최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이문열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장길수 감독은 『허망하고 한심스런 현상』이라고 개탄하고 『어찌 보면 자승자박의 꼴이 됐지만 어쨌든 그 동안의 구태의연한 제작태도에 역설적인 경종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그러나 연말대목에 한국영화를 걸어줄 일류개봉관이 많이 나온다면 영화제작자들도 이에 대비, 많은 돈을 들여 영화를 만드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며 극장측의 성의도 아울러 촉구했다.
한편 영화계는 좋은 한국영화가 있고 없고간에 우선 한국영화만을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전용관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외화를 못 돌려 못 버는 만큼의 돈은 세제혜택이나 영화진흥기금의 지원 등으로 보전해주는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한국영화전용관을 상설해야 한다는 의견들이다.
이에 대해 영화진흥공사측은 한국영화전용관 설립은 공사의 새해 주요업무중 하나라고 밝히고있다.
공사측은 새해3월 착공하는 남양주 종합촬영소 안으로 공사가 이전하는 것과 함께 현 남산의 공사건물을 매각, 이 대금 중 일부를 한국영화전용관 설립에 사용할 계획이다.
공사측은 이 경우 전용관을 직영할 계획이며 이와 함께 일부 극장의 한국영화전용관 지정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헌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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