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칼럼

귀족노조의 끝은 어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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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현대중공업 단체협약에는 '동일 조건하에서 임직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조항이 삽입됐다. 표면상으로 문제는 없다. 자식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부정(父情)이 녹아 있다. 현대차 노조도 올해 협상 때 이 조항을 만지작거렸다. 노조 측은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어 일단 뺐다"고 해명했다. 에쓰오일은 지난해 노사협상에서 중도 퇴직 근로자의 자녀를 우선 뽑기로 합의했다. 당장 이웃인 SK노조가 "우리도 똑같이 해달라"고 맞장구치고 나왔다. 조기 퇴직자의 자녀를 의무적으로 고용하라는 요구를 내놓았다.

이런 규정에는 '불가피한 구조조정' '채용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 '같은 조건이라면' 등등의 갖가지 전제 조건이 붙지만, 장식품에 불과하다. 우리 풍토상 '우선 채용'에 방점이 찍히게 마련이다. 대놓고 말하기 머쓱한 '고용 세습'의 우회적 표현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거점인 울산이 이렇다면, 경영권 세습과 같은 차원에서 노동권 세습에 대해 따져볼 때가 된 듯싶다.

대기업 정규직은 귀족노조라는 표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여전히 낮은 임금에다 사회적 약자라는 것이다. 최근 파업 이후 차 값 인상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현대차 노조는 "총매출 25조원 가운데 노무비는 2조5000억원"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사회적 몰매를 맞을 때마다 귀족노조들은 노조위원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그러고는 "입사 몇 년차인데 기본급 150만원"이라는 읍소가 어느새 우리 사회의 풍경화가 됐다. 그렇다면 왜 그런 열악한 일자리를 기를 쓰고 대물림하려는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노조 측 주장도 일리는 있다. 오래전부터 임직원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는 관행이 있었다. 일자리 대물림은 중도 퇴직자의 생활안정 대책의 하나로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사안이다. 내심 고용세습을 수긍하는 회사도 적지 않다. 현대의 한 임원은 "노조원이 하는 일은 지금도 비정규직과 함께하는 단순조립작업이 대부분"이라며 "비싼 임금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고 말했다. 앞으로 노조가 극단적인 요구를 자제하리라는 기대감도 숨기지 않는다.

단체협약은 민간기업 노사가 자율적으로 맺은 계약이다. 제3자가 간섭해선 안 된다. 얼마나 어렵게 쟁취한 '국내 최고 수준의 임금과 복리후생'인가. 누군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집 자식에게 그냥 넘겨주고 싶겠는가. 경영권 침해라거나 평등한 취업기회 박탈이라는 손가락질은 상식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고용 세습을 통해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뿐이다.

다만 고용세습은 우리 사회의 흐름과는 정반대라는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국가유공자 자녀의 공무원 임용시 가산점을 부여해온 현행 법률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알짜 공기업인 주택공사와 수자원공사는 임직원 자녀 가산점 제도를 없앴다. 귀족노조만이 우리 사회의 이런 발전방향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이쯤 되면 헌법과 노동 관련법을 손질할 때라는 느낌이다. 법률이 보호할 노동권도 노동권 나름이다. 고용세습 사회라면 계급제 사회가 따로 없다. 또 하나, 이런 노조일수록 그동안'경영권 세습'을 지독하게 비난했다. 고용세습 카드를 꺼내기에 앞서 예전 발언부터 취소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옛말이 정말 빈말은 아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