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피곤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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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도자는 그 능력에 따라 상중하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시원치 않은 지도자는 「하군」으로 불리는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다할 뿐이다. 「중군」은 남으로 하여금 견마지로를 다하게 하는 사람이다. 가장 뛰어난 「상군」은 남의 능력을 다하게 하는 사람이다.
부하들이 모두 저마다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면 윗사람은 직접 나서서 할 일이 없다. 그런 지도자는 가만히 앉아서 누가 유능한가만 눈여겨보고 있으면 된다. 그래야 능력 있는 사람을 늘 주위에 둘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가 손수 나서서 매사를 참견하면 아랫사람들은 할 일이 없다. 그들은 앉아서 남의 험담이나 하고 있으면 된다.
이것은 중국춘추시대의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얘기다. 한비자는 한마디로 「술」의 책이다. 정치도 기술이라고 보면 이 책의 교훈은 케케묵은 얘기만은 아니다. 한비자의 술 중엔 이런 충고가 있다.
첫째, 지도자는 상벌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부하들의 요구대로 일거리와 일자리를 주고, 나중에 성과를 가려 약속대로 이루어졌는지를 따져야 한다.
셋째, 리더는 아랫사람에게 호오의 감정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아랫사람들이 지도자의 눈치를 살피게 되면 일을 그릇 판단하기 쉽다.
상군이 되려면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이런 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성악설을 주장한 한비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는 한순간도 방심하거나 틈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중국의 또 다른 고전 중용에는 달 덕이라는 것이 있다. 지도자가 갖출 여러 가지 덕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을 말한다. 그 달 덕을 가지려면 세 가지, 지인 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는 앞을 내다보는 지혜이고, 인은 정중, 겸허, 경건 등을 말한다. 마지막 달 덕인 용은 바로 결단력을 말한다.
공자가 상대하기 싫어한 사람이 있었다. 죽기 살기로 맨주먹으로 범을 때려잡고, 맨발로 강을 건너려는 사람. 공자는 차라리 일을 당하면 두려워하지 않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과 상종하고 싶다고 했다. 용중에서 전진, 전진만을 외치는 용은 필부나 하는 일이고, 진짜 용은 물러설 때 당당히 물러서는 용을 말한다.
요즘 5공 청산을 놓고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정치 술은 하군의 수준도 못되는 것 같다. 그런 정치를 바라보고 있는 국민들은 피곤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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