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만 떠드는 지자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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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방 자치제 관련 법안의 이번 회기 중 통과가 거의 어렵게 됐다.
이 때문에 내년 상반기 중 광역 자치단체(특별시·5개 직할시·9개도)와 기초 자치단체 (시·군·구) 의회선거를 실시한다는 지난 5월 여야 중진회담의 합의 일정 자체가 내년 하반기로 미뤄지거나 자칫하면 당분간 실시가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다.
지방 자치제 법과 지방의원 선거법 등 지자제 관계법들은 최소한 이 번 회기 중 통과되어야 행정 당국이 법령정비·권한이양 등을 준비할 수 있고 각 정당도 후보선정 등 선거에 대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야는 5공 청산작업의 지연을 핑계로 법안심사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야간에는 지자제 선거에서 실패하면 당의 정치적 입지가 타격 받을 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고, 민주·공화당 등 야당은 후보를 낼 수 있는 인적자원이 별로 없는 데다 자기 지역구에 정치적 라이벌을 키우고 싶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개인적 이해들이 겹쳐있다.

<실무소위 이견 확인>
지난 10일 여야 중진회담을 거쳐 구성된 여야 지자제 실무소위 (김종호 민정·최낙도 평민·문정수 민주·김제태 공화)는 20일 한차례 모임을 가졌으나 서로의 이견만 확인하는데 그쳤고, 22일 중진회담에서는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또, 28일 두 차례의 4당 정책위 의장 회담에서는 평민 당이 정당 공천 제를 조건으로 중 선거구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의사를 비쳤을 뿐 법안협상은 지지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예산안과 각종 법안은 물론 「풀뿌리 민주주의」도 5공 문제에 볼모로 잡혀있는 형국이다.
민정 당은 91년에는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도 마무리 짓는다는 지난 5월 중진회담 합의사항에 기초를 두고 지난 9월 광역 자치단체는 중 선거구제, 기초 자치단체는 1구 1∼2인의 혼합 선거구제, 정당추천 배제, 부 자치단체장은 중앙 정부가 임명하는 것을 골자로 한 당론을 확정했다.
박준규 민정당 대표위원은 지난 25일 강원도 횡성·원주 군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이 같은 당론과 함께 내년 상반기 중 지방의회 구성방침을 재확인했다.
이에 비해 야 3당은 지난 3월 국회를 통과시킨 지자제 전면실시를 골자로 한 지방 자치법 야권 단일 안이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된 이후 아직까지 새 단일 안을 마련치 못하고 있다.
협상의 주요 쟁점은 지방 자치법에서 부 자치 단체장의 임명 방법, 상급 단체의 하급 단체에 대한 감독권 행사 범위 등이며 지방의원 선거법에서는 후보자의 정당 추천여부, 선거구, 의원정수 산정 기준 등이다.
부 자치단체장 임명의 경우 민정 당은 국가 행정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유능한 직업 공무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중앙 정부에서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정 당은 나아가 내무장관이나 시·도지사는 하급 자치단체에 대해 강한 지도·감독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 3당도 속셈 달라>
야 3당은 이에 대해 부 자치단체장은 지방의회의 동의를 얻어 지방자치 단체장이 임명하도록 해야 지자제의 본래 취지인 독자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하급 자치단체에 대한 감독도 시정명령 아닌 시정권고 정도로 최소화 해야한다는 견해다. 다만 야권은 실시 초창기에 행정의 계속성·전문성을 살린다는 차원에서 중앙정부의 부 자치단체장 임명권을 첫 임기에 한해 인정하되 지방의회의 동의는 받도록 하는 타협안도 마련중이다.
여야간의 정치적 이해가 가장 많이 걸린 부분이 후보자의 정당공천 문제다. 지방의회 후보 감인 지방 유력 인사가 대부분 친여 성향임을 의식한 민정 당은 정치적 중립의 필요와 4요구조의 병폐를 지방에 재현하지 않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당 공천배제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야3당은 정당공천 또는 후보자가 선거 포스터 등에 지지정당을 명시하는 정당 표시제라도 실시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야당 중에서도 지역 기반이 확실한 평민 당은 정당을 꼭 표시하자는 주장이지만 민주·공화당은 내심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선거구에 있어서는 민정 당은 혼합 선거구제, 평민 당은 소선거구제, 민주·공화당은 중 선거구제를 각각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평민당도 소선거구제에 따른 지역 당 현상의 심화를 우려해 중 선거구제에 적극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속 실시엔 무관심>
선거구 단위와 의원 정수의 경우 여야 4당은 행정구역·국회의원 선거구· 인구수 등을 기준 삼아 각각 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야당 측은 지자제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명분 때문에 조속 실시를 주장하고 있지만 속으론 별반 관심이 없고 민정 당은 민정당대로 그들의 정치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에만 매달려 있어 지자제 협상이 진척될 수 없게 되어있다.
정치권이 엉뚱한 당략으로 협상을 끝내 지연시킨다면 정치권의 직무 유기라고 비판해도 할말이 없을 것 같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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