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족법 개정「남녀평등」법적 보장을 대명제로|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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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0년대 여성계를 관통해 온 가장 큰 이벤트는 단연 가족법 개정 운동이다.
여성계는「전통보다 앞선 천부적 인권」을 민법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연합체를 결성하고 끈질긴 투쟁을 벌여 왔다. 그러나 미풍양속을 주장하는 유림측의 반발도 거세어 80년대로 가족법 개정을 마감하려는 여성계의 뜻을 과연 완벽하게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77년 민법 2차 개정이 이뤄진 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가족법 개정 운동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82년. 이보다 앞서 81년 제5공화국의 성장발전 저해 요인 개선 심의위가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금혼 폐지 등의 안을 사회부문 개선과제로 발표했었다. 이에 따라 한국 가족법학회를 중심으로 법학자들 사이에 가족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세미나를 통해 활발히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업고 한국 가정법률 상담소(소장 이태영)와 대한YWCA연합회 (회장 손인실)가 82년2월20일 가족법 개정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대통령을 비롯한 관계요로에 제출하면서 여성계의 움직임이 표면화됐다.
이것은 84년1월 경제기획원이 새해 업무보고를 하면서 인구 억제 방안으로 민법 중 호주제·상속제 등 남녀 차별조항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여성계를 고무시켰다.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계의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84년7월18일「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가 결성되고부터 한국 여성단체 협의회 산하 25개 단체와 그 밖의 여성단체 30개 등 모두 몇 개 단체로 출범한 이 연합회는 그해 10월 73개 회원단체, 9개 협동회원단체를 거느리는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민법 제 4편 친족, 제5편 상속 개정법안을 독자적으로 내놓기도 했다.
여성연합회는 호주제·동성동본 불혼제 등의 제도개선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유림을 직접 찾아 나서 설득작업을 벌이는 한편 가두서명,「다 같은 인간이다」라는 포스터 배포 등으로 적극적인 시민홍보에 나섰다.
그러나 당초 84년 가을 정기국회에 의원입법으로 가족법 개정을 이루려던 여성계의 시도는 국회제출에 필요한 국회의원 20명의 동의서명을 받지 못한 채 겨우 6명의 의원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특히 당시 여성의원 가운데서도 황산성 의원만 유일하게 서명했을 뿐 다른 여성의원은 서명하지 않아 여성계 내부에 큰 충격을 던졌다.
84년 정기 국회 통과가 무산되자 여성계는 당초 12월까지 시한부로 운영키로 했던 여성연합회를 가족법개정이 통과될 때까지 무기한 존속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 지금까지 여성연합회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가족법 개정이 다시 활기를 떤 것은 86년4월 정부가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 기간 중 여성인력을 활용하고 남녀차별을 없애기 위한 방안으로 ▲호주제 ▲상속제 의 부분 개정 및 폐지를 내용으로 한 여성개발 부문 계획안을 내놓으면서부터다. 가정법률상담소·한국여성유권자연맹 등 여성 단체들은 법개정의 필요성을 활발히 계몽하고 나섰고, 민정당 여성특별위원회(위원장 김영정 의원)도 가족법 개정시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86년11월 김영정 의원 등 62명의 발의로 민법 중 개정 법률안이 제출됐으나 국회 회기 단축으로 제대로 법제 사법위원회의 심의도 받아보지 못한 채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여성계는 전략을「공개원칙」에서「비공개원칙」으로 바꿔「조용한 로비」를 했다.
그 결과 지난해 11월 80년대 사상처음으로 국회재적 과반수 이상(재적의원 2백99명)인 김장숙 의원외 1백52명의 발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여성계는 89년 가을 정기국회를 국회를 통한 가족법 개정의 마지막 시점으로 잡고 지난 10월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회장 이우정)을 주축으로 가두시위까지 불사하는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이같은 작전으로 국회법사위의 민법 중 개정법률안소위가 12월 8일 오전10시 공청회를 갖는데 까지 진전시켰다.
가족법개정의 대모인 이태영 소장은 『이번에는 틀림없이 개정이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면서 『만약 유보조항이 있을 경우 헌법재판소로 가져가든 가, 다시 또 투쟁을 전개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홍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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