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 이념의 홀로 서기-한상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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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국 천안문 사태를 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경악과 비탄은 동구권의 과감한 체제개혁을 보면서부터는 경탄과 자괴의 심정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사회주의국가들도 이처럼 활력 있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부닥칠 때 우리의 마음은 답답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뭐하나" 답답증>
국민의 열화 같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5공 청산을 위한 최소한의 합의사항마저 일관된 원칙으로 밀고가지 못하는 정부·여당의 무능, 기회주의, 반역사성에 대해 국민은 이미 신물이날 정도로 식상한 상태다.
때문에 노 대통령이 유럽을 순방하면서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하고 우아한 포즈를 취한다 하더라도 국내에 비쳐 지는 그의 모습은 믿을 수 없고, 말은 공허하며, 지도력에는 갈수록 균열이 깊게 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럽은 앞으로 의미심장한 변혁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출발해 사회적 평등과 복지를 실현한 사회민주주의 모델과 사회주의로부터 출발해 인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복원을 이룩한 민주사회주의 모델이 서로 공존하는 동서 양 체제의 완충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21세기의 패권을 향한 고르바초프의 경이적인 도전과 만나게 된다. 아직 선례가 없는 역사적 실험을 하고 있기에 불확실한 점이 많지만 사고의 획기적 전환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재구성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어쩌면 민주화와 개방화의 성취로 머지않아 사회주의의 질적인 성숙을 만천하에 증명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가능성은 우리에게 위협이자도전이고 자극이며 탄력 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동구권의 민주화 운동에 우리가 소아병적으로 들떠 자본주의의 승리를 환상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세계사의 격변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문제들에 부닥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사의 흐름으로 뛰어들기 위해서는 우리도 체제개혁에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변개되어야 할 문제의 진단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누가 이것을 어떤 노선으로 관철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불행히도 집권세력은 이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고 야당의 능력은 분할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의 향배를 주시하지만 여기에도 많은 장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민중세력의 연합이 갈수록 약화되는데 있다. 만일이 힘만 견고히 유지할 수 있다면 그 힘으로 야권의 분열을 막을 수도 있고 정부·여당의 한심스런 행태에 대해서도 쐐기를 박을 수 있으련만.
이렇게 보면 체제개혁의 열쇠는 결국 수구세력의 준동을 제어하는 효율적인 민중연합으로 모아진다. 또 이 문제를 깊게 천착해 보면 해결방안의 하나로 변혁이 법의 자립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문화적 종속성이라는 면에서 어떤 정통이론의 급진성·당파성·선명성에 지나치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해 이에 적합한 이 법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다양한 민주세력의 열망을 가로지르는 공통분모를 추출해 이를 일관된 논리로 체계화시키는 작업 같은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탄력적 변혁이념 필요>
그래야만 비로소 수구세력이 최강경파의 급진이론을 역이용하여 민주세력을 분열시키는 공작을 막을 수 있고 흔히 염려되는 중산층의 이반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적극적 노력이 없는 사회운동은 집권층의 자기 파괴적인 악수로 돌출상황이 나오지 않는 한 국부적인 성공만을 거두거나 계속 애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뜻있는 지식인·운동가·학생·시민이라면 누구나 비생산적 이념갈등으로 혼미스러운 우리의 현실에서 이 문제를 심각히 반성해야 하며 변혁이념의 자립화로 사회운동의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적극적이어야 할 줄 믿는다.
자립화란 우리사회의 발전수준에 냉전시대의 반공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적합치 않듯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적 혁명모델도 맞지 않음을 전제한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여·민족통일과 계급적 불평등의 해소가 우리의 현실에서 긴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결과가 사회주의체제의 모순인 거대한 관료적 지배에로 연결되는 불행을 막으려면 참된 의미의 민주적 제도 확충과 민중적 힘의 결집으로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새롭고 탄력적인 이념과 운동노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우리가 명심할 점은 우리 사회의 민중은 박탈과 소외로 퇴적하는 기층민중과 이로부터 상승하는 진취적 기상의 중민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립화 모델로는 원칙상 기층민중에 역점을 두는 것과 중민에 역점을 두는 것이 구별가능하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근대적 노동자·신중산층·청년학생세대 등으로 이루어지는 중민들이 결속해 한편으로는 권력블록의 비민주성에 결연히 투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층민중과 연합해 민주화와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모델이 보다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한 논쟁은 진행 중이지만 이념의 자립화를 향한 논의가 어찌됐건 근래에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최장집 교수의 민중민주주의론을 둘러싼 지난 16일의 숭실대공개토론은 이 개념에 얽힌 항간의 깊은 의혹과 불신을 제거하는데 주효한 것이었다.

<수구파 역습 받기 십상>
보다 더 상징적인 사건으로는 지난 20일 진보정당 결성을 위한 공청회 등에서 장기표씨가 밝힌 변혁이 법을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씨가 『노동해방문학』 11월호에서 개량주의적 변신으로 혹독하게 매도한 것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을 보면 이념의 자립화가 얼마나 큰 진통을 수반할 것인가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과 이치로 볼때 최강경파의 목소리가 필요이상으로 큰데서는 어디서나 민주화가 수구세력의 역습을 방기 십상이다. 따라서 이 위험을 피해가려면 이들의 공허한 급진논리를 누르고 내용 있는 건실한 토론으로 참된 민중연합의 지평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성공한다면 우리도 21세기를 향해 국민의 힘으로 신속히 체제개혁을 밀고 가는 진취적인 모습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교수·사회학>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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