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어쩔 작정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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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치권은 도대체 어쩔 작정인가.
5공 청산도, 예산 심의도, 법률 개폐도, 입법작업도,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는 이런 상황을 정치권은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이며, 그래서 결국 어쩌자는 것인가.
올해도 이제 한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정치 판의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답답하고 암울할 뿐이다.
이른바 5공 핵심 인물의 처리를 둘러싸고 민정당이 혼미 상태에 빠지자 정치권은 연내 5공 청산을 완결할 어떤 방안도, 수순도 마련하지 못한 채 아무 일도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고 있다. 명색 「중진」회담이 열렸지만 어느 당의 어떤 중진도 중진다운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모든 현안에 대해 이견만 재확인하고 속절없이 헤어지고 만다. 그러고도 이런 상황에 대해 어느 당도 돌파구를 열어보려고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머리를 짜내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정국이 이런데도 각 정당의 총재·대표들은 국회를 비우고 뻔질나게 지방 행사에나 돌아다니고 책임을 남에게 미룬다.
우리는 이런 정국 상황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예산심의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오는 12월 2일까지인 법정 시한을 지키기는 이제 틀린 일이다. 법정시한을 못 지킬 경우에 대비한 준예산 제도가 있긴 하지만 법정 시한 내 예산안 통과는 헌법 사항이요, 17년간 굳어진 전통이다.
13대 국회가 굳이 헌법 정신과 17년의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17년의 전통이 비록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대부분 정권의 강압으로 이뤄진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가급적 지키고 존중해 나갈만한 전통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5공 청산과 예산안의 연계투쟁이라는 야당 전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부당성을 지적해 왔다. 예산 심의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야대」로서 예산안을 다른 사안과 연계시켜 전술 수단으로 삼는 것은 곧 민생을 대 정부 압력용으로 담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한심한 것은 예산 심의 과정이 지극히 불성실하다는 점이다. 많은 의원들이 지역구 사업 로비를 벌이거나 예산과 상관없는 정치성 발언이나 일삼고 그나마 예결위에서 자리를 지키는 의원보다 이석 의원이 더 많다는 소식이다.
이제 와 법정시한을 지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예산 심의만은 그래도 좀 똑똑하게, 진지하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국민과 민생을 걱정하지만 예산안보다 더 민생과 직결된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5공 청산이 잘 안 된다고 하여 다른 입법 작업까지 않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고치고 새로 만들어야 할 법들이 무수히 많은데 5공 청산 협상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면 언제 이런 입법 작업을 다 할 수 있겠는가.
지자제 관계법·보안법·안기부 법·경찰 중립화법 같은 제도 개혁에 관한 법을 위시해 농가 부채 경감 법·노동관계법·의료보험 관계법·토지 공개념 관계법 등 국민생활과 사회· 경제의 기본질서와 관련된 수많은 법들이 국회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현행법들로는 규율이 어려운 새로운 사회 현상이 속출하고 있는데도 여기에 기준을 제공할 새 법은 나오지 않음으로써 분규나 갈등의 조정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오늘날 심각한 경제위기나 사회 불안의 근본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정치불안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치가 불안하고 할 바를 못하며 전혀 예측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니까 전체 사회의 기준과 안정이 무너지고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난국의 극복에 모범을 보이고 지혜를 모아야 할 정치권이 도리어 난국을 더욱 심화하고 방향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고 있으니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시점에서 더 이상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주문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더 이상 정국불안·정치 표류가 계속돼서는 안되며 여야 모두 심기 일전해 국면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제 각 정당은 여야 할 것 없이 국민들의 규탄의 눈초리를 의식해야 한다. 국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인 모두에게 쏠리고 있다. 이런 책임을 통감하고 대국적으로 산적한 난제를 풀어갈 각오를 보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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