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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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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근로대중의 영원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 달라!』
『박헌영 동지여 어서 출현하라! 우리는 박동지를 기다린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해방 1주일만인 8월22일이었다. 해방된 서울 땅에 첫발을 딛는 순간 시내 곳곳에 나붙은 이 같은 벽보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번화가인 종로 화신백화점 벽에도「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이시여 나오시라!」는 벽보가 붙어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역시 민중들은 박헌영 선생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 벽보들은 국민들의 순수한 바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박헌영파 공산주의자들이 해방되자마자 조선공산당을 만든 소위 장안파들의 활동에 제동을 걸고 국민들에게는 곧 나타날 박헌영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선전이었다.
해방 다음날 나는 진주에서 독립동지회 동지들과 이우적을 만나 앞날을 의논한 다음 서울로 가서 여운형을 만날 계획으로 먼저 진주로 나갔다.
거기서 이우적 등과 협의, 독립동지회를 팔월회로 확대 개편하고 이우적의 추대로 역시 대표를 맡았다.
그런 다음 김형기·하태·정봉식은 김창숙선생을 서울로 모셔가기 위해 경북 성주로 떠나고 나는 이우적과 함께 상경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은 해방이 되자 지하에 숨어있던 공산주의자, 감옥에서 갓 석방된 공산주의자, 해외로부터 돌아온 좌익분자들이 제철을 만난듯 활개치고 있었다.
모두 독립운동 또는 공산주의운동을 했네 하고 서로 투쟁경력을 내세우며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어 우왕좌왕 했기 때문에 이때의 서울은 마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집단도시 같았다.
특히 일제시대 감옥이라도 한번 안 갔다온 사람은 요즘말로 명함도 못 내밀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나처럼 탄압이 심한 일제의 마지막까지 싸운 사람도 형무소 경험이 없으니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때는 경찰에 잡혀 형무소에 못 가본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민척하게 기선을 제압하고 나선 사람들이 정백·이영·최익한·이승엽·홍승식·강병도·이정윤등을 중심한「서울청년회」또는 ML파계열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해방당일인 8월15일 밤 서울 종로2가 장안빌딩에 모여 1928년에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대한 의견을 모은후 다음날인 16일 밤 다시 모임을 갖고「조선공산당」결성을 선언하고 나섰다. 당시 이들이 장안빌딩에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뒷날 이들을 장안파 공산당이라고 부르게된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쉽게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박헌영계 공산주의자들은 1939년 경성콤 그룹사건 이후 투옥되거나 지하로 잠적했으나 최익한 등은 전향 또는 공산주의운동을 포기, 각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경찰의 눈을 피해 평소 파벌끼리 모이는 등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익한은 당시 주류판매업허가를 얻어 배급 술을 팔아 살았고 강병도는 종로5가에서 신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박헌영계 공산주의자들은 해방을 맞았어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박헌영의 행방은 물론 동료들의 소재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8월16일 최익한 등이 장안빌딩에 모여 조선공산당(일명 장안파 공산당)을 만들고 있는 사이 뜻밖에 서울시내 곳곳에 앞서 말한「박헌영의 등장」을 갈망한다는 벽보가 나붙었던 것이다.
이 벽보는 바로 박헌영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해방 당시 박헌영은 광주의 한 벽돌공장에서「김성삼」이란 가명으로 숨어 지내고 있었다.
박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노린 경성콤그룹사건으로 김삼용등 핵심멤버들이 잇따라 경찰에 검거돼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42년 경찰의 눈을 피해 광주땅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가 해방 때까지 3년동안 은신하던 곳은 바로 광주시 백운동215번지 광주 연와공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낱 벽돌을 굽고 나르는 인부로 위장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다.
박은 콤그룹 일원으로 광주에 있던 조주순·고항(당시 조흥은행 광주지점사원)·윤정달과 김삼용의 처 이순금(이관술의 누이동생)등 심복 4명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있는 콤그룹 조직원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해방 사흘후인 8월18일 박헌영은「벽보」의 갈망대로「김성삼」이란 가명을 벗어 던지고 광주에서 상경,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은 이순금등 4인의 심복 외에 상경길에 전주에 들러 형무소에서 갓 출옥한 김삼용을 만나 함께 서울에 왔다.
「박헌영동지 무사히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공산주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퍼져 비상한 파문을 일으켰다.
박헌영의 등장은 바로 해방정국을 좌우대립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서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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