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서 대접받은 북방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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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의 대통령이 소련의 묽은 광장에서나 볼 수 있는 붉은 별의 견장을 달고 뻗장다리 걸음을 하는 헝가리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우리가 적대세력으로 간주하던 바르샤바 동맹군 군대가 애국가를 연주하고 태극기에 거수경례를 했다.
동서냉전의 벽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노 대통령의 헝가리 의회 연설 역시 극적인 순간이었다.
베를린 장벽을 헐어낸 역사적 변화에 불을 댕긴 이곳 헝가리에서, 특히 그 개혁의 요람이라 불리는 의회에서 동구의 모든 국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냉전의 희생물이었던 한국의 대통령이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부다페스트 곳곳에 대형 태극기가 헝가리 삼색기와 함께 휘날리고 헝가리 최대 유력지 마자르 힐랍(헝가리헤렬드), 내프샤바(인민의 소리)지는 1면 머리제목을 한글로「환영 노태우 한국 대통령 내외 공식방문」이라고 뽑았다.
헝가리 정부는 북한의 방해공작을 우려해 북한대사관 직원 이외의 모든 북한사람들을 출국시켰다고 한다.
우리와 비자면제 협정을 체결하는 대신 북한과 이미 맺었던 이 협정은 지난 7월 폐기시켜 버렸다. 헝가리의 모든 정부기관이 한국손님을 맞기 위해 잠시 일손을 놓은 듯이 보였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의회 연설만 해도 단순히 의례적인 행사가 아니라 아시아의 성공한 작은 나라 대통령이 무엇을 얘기하려 하는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믿는 한국으로부터 무엇인가 배워보자는 자세가 역력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몇억 달러의 차관만은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 배어 있는 문화적 전통과 저력을 보더라도 우리에게 손을 벌릴 정도로 가난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돈」보다는「정신」을 배우기를 희망했다.
쉬로쉬 대통령 대행도 정상회담에서『우리가 결코 원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력해 나가자는 것』이라며 한국의 발전모델을 부러워했다. 헝가리 기업가들과의 오찬에서도 이곳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의 기적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번 노 대통령의 유럽4개국 순방 중 우리정부가 가장 비중을 둔 것은 헝가리 방문이다.
서독 방문이 베를린 장벽 붕괴로 통독에 대한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또 다른 얄타체제의 희생물인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국제적인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헝가리 방문은 우리의 북방외교를 동구개혁의 선두주자인 헝가리에서 실증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헝가리·서독방문은 물론 지난 3월부터 추진돼온 것이기는 하지만 시기상으로 동서 냉전체제가 급속히 퇴조하고 있는 것과 아주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정부의 이 같은 외교적 계산은 23일 노 대통령의 헝가리의회 연설에서 나타났다.
헝가리 TV에서 사상 처음으로 생중계하고 동시 통역까지 붙여 의례적인「접대」차원을 떠나 최상의 예우와 관심을 보인 것이 그 증거다.
헝가리 정부는 물론 여야 지도자들까지 앞 다투어 노 대통령과의 면담에 열을 올렸다.
노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을 계기로 우리가 한-헝가리 관계를 동서화해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했다면 헝가리는 개혁과 개방의지를 보여주는 시범 케이스로 삼았던 듯 하다.
쉬로쉬 대통령 권한 대행을 비롯한 여야 지도자들은 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한결 같이 한국의 통일방안과 유엔 가입을 지지하고 북한의 개방화에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했다. 헝가리 측은 또 우리의 북방외교가 계속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다른 동구국가들에 설득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와중에서『북한이 고립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밝혀 우리 북방외교의 목표를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남은 과제는 헝가리가 경제난국 타개 방안으로 기대하고 있는 경제적 지원 역할을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충족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부다페스트=문창극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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