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대에 선 "명사수" 박종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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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국 사격의 최고명수 박종길씨(박종길·44)가 「돌아온 장고」 처럼 다시 사대 (사대) 에 섰다.
80년대 중반까지 사격계를 주름잡던 한국 권총의 대부 박종길씨가 지난 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직후 소리 없이 대표팀을 떠났다 이번 가을 소리 없이 대표팀에 돌아온 것이다.
그가 그동안 국제 무대에서 획득한 메달만도 60여개. 그 중에는 아시안 게임과 아시아 선수권 대회 8개 등 수준급의 국제 대회에서 얻은 금메달 12개와 세계 선수권 대회 (78년) 은메달 1개도 포함돼 있다.
박씨는 70년대 후반기(77∼78년)에는 권총의 5개 전 부문에서 한국 최고 기록을 보유, 고 박종규씨(박종규) 에 이어 제2의「피스톨 박」이란 닉네임을 갖기도 했다.
그가 78년 세운 스탠더드 권총의 한국기록 (5백79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박씨는 타고난 총잡이였다.
이렇듯 화려했던 전력의 박씨가 총을 놓은 건 86아시안 게임 직후..
아시안게임 당시 속사 권총에서 금메달 1개를 따낸 박씨는 이어 열린 센터 파이어 권총에서 기대를 깨고 은메달에 그치자 소속팀 (88 사격팀) 단장에게 불려가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매를 맞았다는 비화가 있다.
당시의 「사건」이 대 선수로 성장한 자신을 견제하기 위한 B감독의 「사주」때문이었다고 판단한 박씨는 『이런 풍토에서는 더 이상 총을 잡을 수 없다』 며 대표팀을 떠났다.
그러나 뾰족한 생계 수단이 없어 그후 자녀 교육에 생활고까지 겪게되자 그해 말 선배의 주선으로 광운대 사격부 코치로 부임했다. 유능한 선수는 역시 유능한 지도자였다. 그때부터 그가 지도한 광운대 권총팀은 올해 전국 체전까지 거의 3년간 한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을 정도의 전국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맡은 팀의 성적이 좋았어도 박씨는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을 메울 수 없었다.
현역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박씨는 지난해 6월 서울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나가 속사와 스탠더드 권총에서 모두 1위를 기록, 당연히 태극 마크를 달아야 했으나 86년 당시 자신을 견제했던 감독과 절친한 사격 연맹의 당시 집행부 일부 인사의 공작으로 끝내 서울 올림픽 출전이 좌절 됐었다. 우여 곡절 끝에 심판으로 올림픽에 나선 박씨는 당시 동갑내기 친구이자 국제대회 라이벌이던 소련의 쿠즈민이 서울 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지난 5월 유럽 선수권대회 속사 권총에서 5백90점으로 세계 신기록까지 세우자 박씨는 큰 자극을 받았다. 지난 6월 다시 총을 잡은 박씨는 9월 전국 체전에서 후배들과 겨뤄 은1·동1개로 활동을 재개했다.
한편 지난6월 새로 들어선 사격 연맹의 신임 집행부는 박씨의 성실성과 실력을 높이 평가, 12월 체육회 승인이 나는 대로 이번 겨울부터 박씨를 대표팀 코치 겸 선수로 뛸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신동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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