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국프리즘

"우리 고전 번역할 전문가 많이 키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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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영국의 유명한 시인 키츠는 호머를 처음 만난 감격을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천문학자의 환희, 혹은 이른바 '신대륙 발견' 시 서구인으로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맞대하게 된 어느 군인의 흥분에 비유한 바 있다. 희랍어를 전혀 모르던 그가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채프먼이라는 번역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통해 영시 사상 한 이정표를 긋는 불멸의 소네트 한 편을 남길 수 있게 된다.

문화의 핵심에는 글이 있다. 글을 통하지 않고는 문화고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고 제대로 계승 전수될 수 없다. 유럽의 문예부흥기에 나라마다 앞다퉈 희랍과 로마의 고전들을 자국어로 번역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요즘 '문화의 세기'를 앞세우며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운위하면서도 정작 우리 고전에 대한 번역을 등한시하는 것은 분명 반문화적 책임 방기라 아니할 수 없다. 핑계야 왜 없겠는가.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왜곡.압살하려 했던 식민통치, 그 이후의 미군정, 곧이어 안방을 차지한 서구식 대학 중심의 교육제도와 입시지옥, 그리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등. 온 나라가 힘을 모아 우리의 고전을 비하하고 우리의 전통을 끌어내리는 데 열심이었다. 그 뒤를 이은 영어 광풍이라니!

그 결과로 우리의 전통고전은 골방 신세가 되고 전문가들도 변방으로 밀려나 대학이나 전문 연구기관의 언저리에도 끼지 못하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말로는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한 세기도 넘지 못하여 캄캄 절벽과 부닥치게 된다. 미국의 일천한 역사를 조롱하지만 정작 그들 독립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 전통문화의 지평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 중심에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의 번역작업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사상과 예지, 그 문향(文香)을 담고 있는 그것을 우리의 당당한 전통으로 안아야만 반만년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되살릴 수 있다. 한문 고전을 괄호로 묶는 한 우리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를 넘어서기도 쉽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챙겨야 한다. 민족문화추진위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국문집총간'을 번역하는 데만도 현재의 인력으로는 수십 년이 걸린단다. 지방 곳곳의 향촌에 묻혀 있는 문집 등을 포괄하자면 현재의 수백 배가 넘는 국역전문가가 필요한 것이다.

서울을 제외하고 전북지역에 전국 유일의 국역연수원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다면 전통문화 중심도시에 부끄러움만 덧칠하는 꼴이 될 것이다. 연수원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그 지원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 한 영문학자의 열변이, 그야말로 영문 모르는 객담으로 치부될 날이 하루속히 왔으면 좋겠다.

이종민 전북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