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주기중 특파원이 본 「서 베를린의 휴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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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독의 국경이 개방된 후 두 번째 맞는 주말 서 베를린에만 1백50만명의 동독인들이 「주말 나들이」를 하는 등 서독 전역에 모두 3백만명으로 추산되는 동독인의 인파가 줄을 이었다.
동독 당국은 시민들의 서독 나들이 편의를 위해 72개의 특별 열차를 편성, 운영했고 국경에 15개의 새로운 통문을 뚫어 주었다. 특별 열차마다 4백%의 정원 초과 탑승을 시켰음에도 중간역 마다에는 미처 차를 타지 못한 인파들로 북적대 북새통을 이루었다.
서독 당국은 앞으로도 당분간 이 같은 동독인 러시가 지속될 것으로 판단, 이들이 주로 찾는 과일 등을 긴급 수입키로 하는 한편 이들에게 나누어 줄 1인당 1백 마르크씩의 환영비조로 내년 예산에 5억 마르크를 추가 편성하는 등 장단기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동독 관영 ADN통신은 내무부 발표를 인용, 지난 9일 국경 개방 이후 18일까지만 전국민의 63%가 넘는 1천만명 이상에게 서독행 비자가 발급됐다고 보도했다.

<동독인 6o%가 다녀가>
○…「미칠 것 같아요」,「상상도 못 했어요」,「놀랐을 뿐이에요」18, 19일 이틀 동안의 주말을 이용해 서베를린을 여행하고 다시 돌아가는 동독 시민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베를린에서 3백km 떨어진 바이마르시에서 왔다는 2O대 초반의 젊은 부부, 2백km떨어진 할레시에서 온 30대 부부, 모두 서베를린 여행이 처음이라고 했다. 기차로 밤새 달려와 하룻 동안 그들이 말하는 「저쪽」(서베를린) 을 보고 난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동독 정부의 국경 개방 후 첫 주말인 지난 12∼13일보다는 적은 인파였지만 이번 이틀동안 서베를린을 여행한 동독시민은 줄잡아 1백50만명. 지난 1주일 남짓 서베를린과 서독을 여행한 사람은 1천만명을 육박, 동독 시민의 60%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주말이 시작된 18일 오전 8시 (현지시간). 분단 전 베를린의 심장부였던 포츠담 광장(영국군 관할 지역). 영하의 추운 날씨에 서베를린을 찾는 동독 시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두텁게 옷을 입힌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오는 젊은 부부, 휠체어를 탄 칠순의 할머니, 모두가 기대에 들뜬 표정들이다.
서베를린시 당국은 대형 컨테이너에 과자와 과일을 잔뜩 실은 트럭을 대기시켜놓고 오는 사람마다 선물을 나누어준다. 비닐 백에 담아 주는 과자를 들여다보며 좋아하는 어린이들. 부모들도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흐뭇한 표정들이다

<역마다 통제 불능 인파>
○…18일 오전 11시. 베를린시 남쪽 끝의 포츠담으로 통하는 글리니크교 (미군 관할 지역). 베를린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탓으로 동서 베를린의 버스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동독시민들을 운송해주고 있다.
서베를린으로 넘어오는 인파와 다시 돌아가는 인파로 차량 행렬이 1km 이상 이어지는 혼잡을 이루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진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깡충대는 젊은이들은 해방감에 충만된 얼굴들이다.
동서양측의 경찰들이 의논해가며 인파를 정리하는 모양도 인상적이다.
○…18일 오후 4시 어둑어둑한 브레나우어가 (프랑스군 관할 지역). 서독쪽으로 넘어 오는 사람들 보다 돌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양손에 가득찬 비닐 바구니를 들고 헐어버린 장벽 틈의 통로에서 동독 경찰들에게 신분증을 내보인다. 경찰도 힐끗 쳐다볼 뿐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돌아가기 직전 프랑스군들이 제공하는 따끈한 코피를 마시며 돌아가기가 아쉬운 듯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쪽에서는 귀가하는 동독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호객하는 과일 장수의 목소리가 걸쭉하다. 지난 주 처음 동독시민들이 몰려들었을 때는 바나나와 오렌지가 동이 났던 탓으로 한목 노린 장사다.

<학생들 전자 제품 관심>
○…서베를린의 번화가인 쿠담가. 추운 날씨에 평상시 주말이면 한적한 거리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인파로 북적댄다.
행인의 90% 이상이 동독 사람들. 화려한 진열장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15∼l6세의 학생들이 룩색을 짊어지고 이것저것 손가락질하며 입술을 깨물기도 한다.주로 레코드 가게와 전자 제품 가게에 오래 서성거린다.
○…토요일 아침부터 서독 정부가 주는 1백마르크 (약3만6천원)씩의 「환영비」를 받기 위한 동독인의 행렬이 2백m나 이어진 곳도 있다. 서 베를린시 당국은 이런 추세로 라면 연말까지만 6억마르크가 소요될 것 같다고 이곳 신문들은 보도하고 있다.
동독 시민들은 이 용돈으로 동독에서 구하기 힘든 생활 용품을 사기 위해 음식을 미리 장만해와 끼니를 해결해가며 쇼핑하고 있다. 이들이 이용하는 상점은 「동전 가게」로 불리는 염가품 슈퍼마킷으로 인파가 붐비는 통에 아예 문을 폐쇄했다가 손님이 빠지는 만큼 들여보내는 곳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상점에 따라서는 물건이 동이나 아예 일찍 문을 닫아버린 곳도 있다는 것이 현지 상인들의 말이다.

<서베틀린 시민 짜증도>
○…이처럼 동독의 인파가 몰리자 서베를린 시민 중에는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다. 우선 지하철과 버스 등 공공 교통 수단이 초만원 사태를 이뤄 「장벽을 다시 막아라」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다. 보통 때의 3∼4배 승객이 밀리는 통에 연발·연착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동독쪽에서도 72개의 특별 열차를 편성, 승객들을 운송했으나 역마다 통제 불능이었다고 동독의 관영 ADN통신이 보도. 이 통신은 열차마다 4백% 초과 탑승시켰으나 한역에서 5백여명씩 못탄 경우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서베를린에서는 장벽이 헐리면서 콘크리트 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로 작은 논쟁이 일고 있다고 현지신문이 보도. 43·lkm에 이르는 장벽이 이제 실제적인 의미를 잃은 이상 모두 헐어 기념품으로 판매하자는 익살도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비인간성의 징표」로서 일부는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동독 화폐 가치 폭락>
○…현재 베를린의 22개소를 포함, 동·서독 양쪽 경계선을 통해 모두 60개 이상의 통로가 마련돼 동독 시민들이 자유스럽게 드나들고 있다. 전에는 제한적으로 발급 받은 비자로 단 한차례 서독을 여행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6개월 기한으로 아무 때고 드나들 수 있게됐다.
○…동독 시민들이 대거 서독으로 여행하게 되면서 동독 화폐 가치의 폭락 사태가 벌어져 동독 정부 당국이 비상 대책 마련에 나서고있다.
국외 반출이 금지된 동독 마르크는 한때 12대1의 비율로 서독 마르크와 비공식적으로 거래됐으나 너무 많이 가지고 나오는 통에 18·19일에는 20대1로 폭락. 서독 은행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시민들을 위해 l6대1로 환전해주기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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