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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4주 뒤'도 못 본 정부, '4년 뒤' 백신 허브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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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부산 해수욕장 파라솔 접는다 휴일인 8일 일본을 향해 북상 중인 제9호 태풍 '루핏' 영향으로 비가 내리고 먹구름이 몰려오자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 피서객들이 찾지 않아 썰렁하다. 부산시는 하루 평균 확진자가 100명을 넘어서는 등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지자 사회적 거리두기를 오는 10일 0시부터 4단계로 강화해 해운대 등 부산 지역 해수욕장도 모두 폐쇄한다. 송봉근 기자 20210808

부산 해수욕장 파라솔 접는다 휴일인 8일 일본을 향해 북상 중인 제9호 태풍 '루핏' 영향으로 비가 내리고 먹구름이 몰려오자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 피서객들이 찾지 않아 썰렁하다. 부산시는 하루 평균 확진자가 100명을 넘어서는 등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지자 사회적 거리두기를 오는 10일 0시부터 4단계로 강화해 해운대 등 부산 지역 해수욕장도 모두 폐쇄한다. 송봉근 기자 20210808

“인류의 3대 적(敵)은 열병과 기근, 그리고 전쟁이다. 그중 단연코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적은 열병이다.”

대통령의 "짧고 굵게" 전망 오류 #'불편한 목소리' 들어야 진실 보여 #비합리 가득한 방역 지침 손봐야

얼마 전 하버드대 의학 저널에 소개된 캐나다 출신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의 말이다. 1896년 미국 의학 협회 연설에서 나온 그의 분석이 요즘 세계 의학계에서 자주 인용된다. 오슬러의 발언이 나온 시점은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강타하기 22년 전이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참상을 목격한 그가 이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 사태의 파괴력 차이를 정확히 내다본 사실은 두고두고 회자한다. 불안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앞날에 대한 말 한마디가 신경을 집중시킨다. 권력과 정보를 쥔 사람의 얘기는 더 그렇다.

“2025년까지 (한국이) 세계 5대 백신 생산 국가로 도약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일 청와대에서 열린 ‘글로벌 백신 허브화 추진위원회’ 첫 회의에서 이런 전망을 했다. 4년만 참으면 백신 풍년을 맞게 된다니 반갑다. 5년간 2조 2000억원에 이르는 투자 규모도 묵직하다. 그런데도 이 얘기가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짧고 굵게 끝낼 수만 있다면 일상의 복귀를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 것.”

4주 전 문 대통령은 수도권 4단계 조치를 시행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결과는 완전히 빗나갔다. 주말임에도 확진자 수는 어제 1729명, 그제 1823명에 이르렀다. 문 대통령이 ‘짧고 굵게’ 희망을 던진 다음 날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출석해 “확진자가 더 발생할 수 있다”고 찬물을 끼얹었다. 질병청은 8월 중순의 일일 확진자 수 예상치로 ‘2331명’을 제시했다. 대통령과 ‘방역 영웅’의 엇갈린 발언은 당혹감을 안겼다.

대통령은 감염병 전문가가 아니니 누군가 발언의 근거를 제공했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불과 4주 뒤면 허구로 드러날 기대를 품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백신 물량은 충분하고, 접종도 계획대로 차질없이 진행될 것."

지난달 14일 김부겸 국무총리가 백신 예약 시스템 먹통 사태를 사과하면서 내놓은 장담이다. 불과 몇 시간 뒤 다시 장애가 발생했고 예약 날마다 목불인견 상황이 빚어졌다. 급기야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행정안전부ㆍ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민간이 함께 해결하라고 질책했다.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도하는 총리의 장악력이 초라하다. 오늘 시작하는 40대 예약이 주목된다.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

돌이켜보면 1년 반 전 문 대통령이 경제계 간담회에서 이 언급을 했을 때 대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경고가 없진 않았다. 그즈음 감염병 전문가인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내년까지 갈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그는 백신 허브위원회에 민간 위원으로 참여할 정도로 현 정부와 신뢰가 있다. 진작 귀를 열고 치열한 토론을 이어왔다면 민망한 오답의 행렬은 일찌감치 멈췄을 수도 있다.

"3500~4000명까지 갈 수도 있다."

이 이사장의 예측이다. 델타 변이를 비롯해 기존 방역 체계를 무력화하는 변화가 불가피해 이젠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백신이 유일한 게임체인저이기 때문에 접종률이 방역 지침의 1차 기준이 돼야 한다"며 "감염자 수 등은 부차적 지표로 삼아야 할 단계"라고 말한다. 현재 백신 접종률이 저조해 방역을 풀기 어렵지만, 앞으로 접종률에 따른 변화를 제시해 접종 참여를 높이고 일상의 변화를 예측하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OECD 38개 회원국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OECD 38개 회원국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자영업자는 무너지고, 따로 사는 부모와 저녁도 못 먹는 일상의 고통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변화의 제안은 다양하게 표출된다.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외신을 분석해 SNS에 공유해온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확진자라는 용어부터 일본ㆍ대만처럼 감염자나 양성자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는 어제 상점이 줄폐업하는 서울 명동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저녁 6시 이후 2인 제한은 말도 안 되는 탁상공론"이라며 "지금과 같은 거리 두기는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변화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만, 선뜻 말을 못 꺼낸다"며 "정부가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지가 클수록 독단도 커진다."

위기 타개를 위해선 오슬러의 이 말을 곱씹어보자. 의학계의 존경을 받는 그가 왜 도그마를 경계했을까. 전대미문의 위기 앞에선 모두의 지혜를 모아도 부족하다. 백신 접종과 관련해 엉뚱한 전망을 한 인사도 우리 편이면 중책을 맡기고 사스ㆍ신종플루ㆍ메르스 사태를 돌파해온 감염병 전문가조차 지난 정부에 기여가 컸다고 투명인간 대우를 하는 편협함으로는 코로나19를 이기지 못한다.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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