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3대 적(敵)은 열병과 기근, 그리고 전쟁이다. 그중 단연코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적은 열병이다.”
대통령의 "짧고 굵게" 전망 오류 #'불편한 목소리' 들어야 진실 보여 #비합리 가득한 방역 지침 손봐야
얼마 전 하버드대 의학 저널에 소개된 캐나다 출신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의 말이다. 1896년 미국 의학 협회 연설에서 나온 그의 분석이 요즘 세계 의학계에서 자주 인용된다. 오슬러의 발언이 나온 시점은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강타하기 22년 전이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참상을 목격한 그가 이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 사태의 파괴력 차이를 정확히 내다본 사실은 두고두고 회자한다. 불안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앞날에 대한 말 한마디가 신경을 집중시킨다. 권력과 정보를 쥔 사람의 얘기는 더 그렇다.
“2025년까지 (한국이) 세계 5대 백신 생산 국가로 도약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일 청와대에서 열린 ‘글로벌 백신 허브화 추진위원회’ 첫 회의에서 이런 전망을 했다. 4년만 참으면 백신 풍년을 맞게 된다니 반갑다. 5년간 2조 2000억원에 이르는 투자 규모도 묵직하다. 그런데도 이 얘기가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짧고 굵게 끝낼 수만 있다면 일상의 복귀를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 것.”
4주 전 문 대통령은 수도권 4단계 조치를 시행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결과는 완전히 빗나갔다. 주말임에도 확진자 수는 어제 1729명, 그제 1823명에 이르렀다. 문 대통령이 ‘짧고 굵게’ 희망을 던진 다음 날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출석해 “확진자가 더 발생할 수 있다”고 찬물을 끼얹었다. 질병청은 8월 중순의 일일 확진자 수 예상치로 ‘2331명’을 제시했다. 대통령과 ‘방역 영웅’의 엇갈린 발언은 당혹감을 안겼다.
대통령은 감염병 전문가가 아니니 누군가 발언의 근거를 제공했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불과 4주 뒤면 허구로 드러날 기대를 품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백신 물량은 충분하고, 접종도 계획대로 차질없이 진행될 것."
지난달 14일 김부겸 국무총리가 백신 예약 시스템 먹통 사태를 사과하면서 내놓은 장담이다. 불과 몇 시간 뒤 다시 장애가 발생했고 예약 날마다 목불인견 상황이 빚어졌다. 급기야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행정안전부ㆍ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민간이 함께 해결하라고 질책했다.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도하는 총리의 장악력이 초라하다. 오늘 시작하는 40대 예약이 주목된다.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
돌이켜보면 1년 반 전 문 대통령이 경제계 간담회에서 이 언급을 했을 때 대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경고가 없진 않았다. 그즈음 감염병 전문가인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내년까지 갈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그는 백신 허브위원회에 민간 위원으로 참여할 정도로 현 정부와 신뢰가 있다. 진작 귀를 열고 치열한 토론을 이어왔다면 민망한 오답의 행렬은 일찌감치 멈췄을 수도 있다.
"3500~4000명까지 갈 수도 있다."
이 이사장의 예측이다. 델타 변이를 비롯해 기존 방역 체계를 무력화하는 변화가 불가피해 이젠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백신이 유일한 게임체인저이기 때문에 접종률이 방역 지침의 1차 기준이 돼야 한다"며 "감염자 수 등은 부차적 지표로 삼아야 할 단계"라고 말한다. 현재 백신 접종률이 저조해 방역을 풀기 어렵지만, 앞으로 접종률에 따른 변화를 제시해 접종 참여를 높이고 일상의 변화를 예측하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자영업자는 무너지고, 따로 사는 부모와 저녁도 못 먹는 일상의 고통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변화의 제안은 다양하게 표출된다.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외신을 분석해 SNS에 공유해온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확진자라는 용어부터 일본ㆍ대만처럼 감염자나 양성자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는 어제 상점이 줄폐업하는 서울 명동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저녁 6시 이후 2인 제한은 말도 안 되는 탁상공론"이라며 "지금과 같은 거리 두기는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변화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만, 선뜻 말을 못 꺼낸다"며 "정부가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지가 클수록 독단도 커진다."
위기 타개를 위해선 오슬러의 이 말을 곱씹어보자. 의학계의 존경을 받는 그가 왜 도그마를 경계했을까. 전대미문의 위기 앞에선 모두의 지혜를 모아도 부족하다. 백신 접종과 관련해 엉뚱한 전망을 한 인사도 우리 편이면 중책을 맡기고 사스ㆍ신종플루ㆍ메르스 사태를 돌파해온 감염병 전문가조차 지난 정부에 기여가 컸다고 투명인간 대우를 하는 편협함으로는 코로나19를 이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