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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조롱당한 K방역과 서번트 증후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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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2월 설 명절을 맞아 청해부대원들이 코로나19를 함께 극복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청해부대원들은 백신을 맞지 못해 대거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뉴시스]

지난 2월 설 명절을 맞아 청해부대원들이 코로나19를 함께 극복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청해부대원들은 백신을 맞지 못해 대거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뉴시스]

 우리 군의 자랑인 청해부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소식은 참담하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의 깜짝 선물로 준 얀센 백신으로 예비군과 민방위 대원까지 접종 한 마당에 배 안에서 온종일 작전하는 특수부대원을 방치한 정부의 판단력은 절망적이다. 500명대에 머물던 국내 하루 확진자 수는 김부겸 국무총리가 거리 두기 완화 계획을 발표하자 600명대로 올라섰고 시행 예정일 무렵엔 700명대가 됐다. 놀란 정부가 거리 두기 완화를 한 주 유예했으나 그사이 1000명을 넘었다. 1년 반 넘게 코로나19와 씨름하고도 확산 예측을 정반대로 했다.

허술한 대응 속 120 bpm 규제 #엉터리 디테일로 국제망신 자초 #전문가ㆍ시민과 소통 강화 절실

이런 와중에 헬스장 집단 운동 음악의 120 bpm(분당 비트 수) 규제가 튀어나왔다. bpm 제재는 난이도가 최상급이다. 방역의 기본에서 초보적 실수를 연발하면서도 한쪽에선 엄청난 디테일의 규제를 창조하는 정부의 모습에서 영화 ‘레인맨’이 떠올랐다. 독특한 사고 체계로 일상이 위태롭지만, 특정 분야에선 경이로운 면모를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 환자 레인맨(더스틴 호프만)이 주인공이다.

영화 '레인맨'의 한 장면.

영화 '레인맨'의 한 장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그는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하루 만에 외워 조우한 사람의 이름만 보고 개인정보를 알아맞히는 집중력과 디테일을 보여준다.

정부가 새로 적용한 방역 수칙의 디테일은 경이롭다. 120 bpm은 일각일 뿐이다. 탁구를 할 때 단식은 되고 복식은 안된다. 배드민턴은 복식도 가능하다. 난센스 퀴즈 같은 조항이 끝도 없다.

정부가 공개한 무도학원 방역 수칙.

정부가 공개한 무도학원 방역 수칙.

시민에게 암기도 추론도 불가한 디테일을 강요하는 당국이지만 기초 영역에선 초등학생 수준에 못 미친다. 한창 진행 중인 백신 교차 접종이 대표적이다. 두 번 맞는 백신의 접종 인원은 ‘전체 물량÷2’로 산출한다. 우리 정부는 그 계산을 못 했다. 1차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한 사람이 2차 물량이 없어 화이자를 맞는다. 지난 정부에서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정기석 한림대 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2회차분에 문제없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얘기했는데…”라고 했다. 185만명분의 모더나 백신을 두고 352만명에게 온라인 예약을 권유하면 사달이 나는 건 정해진 귀결이다. 낼모레 환갑인 사람들을 모니터 앞에서 뜬 눈으로 밤새우게 했다.

지난 12일 질병관리청 코로나19 예방접종 사전예약 페이지 캡처. [연합뉴스]

지난 12일 질병관리청 코로나19 예방접종 사전예약 페이지 캡처. [연합뉴스]

서번트 증후군 환자는 때로 주위에 놀라운 선물을 준다. 레인맨은 카지노의 카드를 모조리 외워 함께 여행하는 동생(톰 크루즈)에게 횡재를 선사했다. 반면 우리 정부의 초극강 디테일은 자괴감을 안겼다. ‘BTS는 되고 블랙핑크는 안된다’는 비아냥 기사가 해외에서 이어진다. ‘얼치기 서번트 증후군’의 비애다. 수칙 속 120 bpm은 허점투성이다. bpm은 밴드 연주자, 특히 드러머에게 중요하다. 사람의 연주는 100번 공연하면 100번 모두 조금씩 다르다. 그러니 같은 퀸의 노래라도 어떤 라이브냐에 따라 처벌될 수도, 안될 수도 있다.

영국의 전문가가 지적한 ‘한 박자에 두 걸음’은 꼬투리 잡기가 아니다. 군 복무 시절 문화선전대 밴드에 파견된 적이 있다. 전국 부대를 다니며 장병들의 신청곡을 받아 반주했다. 병사들은 윤수일의 ‘아파트’나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같이 빠른 곡을 주로 부르지만, 간부들은 느린 트로트를 선호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애창곡 ‘꿈꾸는 백마강’도 단골 신청곡이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로 시작하는, bpm 60~70 정도의 노래다.

문재인 대통령 블로그 캡처.

문재인 대통령 블로그 캡처.

이 곡을 원래 속도로 연주하면 모처럼 달아오른 열기가 급랭한다. 신나게 흔들던 병사들에게 갑자기 바람 풍선 인형처럼 팔을 휘두르며 할머니 춤을 추라는 격이다. 그래서 나온 게 ‘2배속 연주’다. 드럼 비트를 두배로 빠르게 하면 흥이 산다. ‘꿈꾸는 백마강’ 드럼 악보를 보면 bpm이 120 이상으로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트로트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참 헛짚은 디테일이다. 새 방역수칙이 누구의 발상이냐는 질문에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은 “집단 지성 하에 만들어낸 안”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 ‘집단 지성’의 가장 큰 문제는 소통 부재다. 120 bpm 기준을 만들 때 “줌바 관련 인사와 상의했다”는 설명인데, 감염병 전문가 견해도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병율 차의과대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의사협회나 병원협회 등의 견해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좌뇌와 우뇌의 불균형이 서번트 증후군을 심화시킨다고 한다. 방역만이라도 과거 정부, 현 정부 따지지 말고 감염병 대처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의 지혜를 빌려야 하지 않을까. 힘겨운 시간을 견뎌온 시민들이 양극단의 고문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정부는 현장ㆍ전문가ㆍ국민과의 거리 두기부터 완화해야 한다.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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