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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이용구의 ‘블랙아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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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후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이 모 부사관의 추모소를 찾아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있다. 2021.6.6./청와대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후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이 모 부사관의 추모소를 찾아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있다. 2021.6.6./청와대제공

 성추행 피해 부사관 사망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의 사의를 즉각 수용한 소식은 약간 놀라웠다. 물의를 빚은 공직자는 바로 물러난다는 상식이 무너진 지 오래여서다.

법무차관의 만취 폭행ㆍ욕설 영상 #뻔히 알면서 반년 넘게 자리 지켜 #청와대 검증서부터 재확인해야

2018년 강원랜드 채용 비리가 적발됐을 때 오랜 관행과 달리 부정입사자에게 즉각 엄중한 책임을 물으라고 문 대통령은 지시했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법언이 현 정부 초기의 기조가 됐다. 그런데 정의가 슬슬 늘어지는가 싶더니 갈수록 심각해져 ‘지체 불감증’에 이르렀다.

지난달 12일 사상 처음으로 ‘피고인 서울중앙지검장’이 된 이성윤 지검장은 수사 직무에서 즉시 배제되리란 예상을 깨고 자리를 지키다 지난 4일 서울고검장으로 승진했다. 자신이 요청한 검찰수사심의위원회조차 압도적으로 기소 의견을 냈기에 “해도 너무한 인사”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택시기사의 멱살을 잡는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모습이 영상에 담겨 있다. 사진 SBS 캡쳐

택시기사의 멱살을 잡는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모습이 영상에 담겨 있다. 사진 SBS 캡쳐

‘지체된 정의’의 정수는 지난 3일 물러난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이다. 지난해 11월 택시 기사를 폭행한 지 6개월이 지나도록 꿋꿋이 버텼다. 지난 2일 SBS 뉴스에 공개된 이 전 차관의 폭행 동영상은 두 가지 면에서 놀랍다. 우선 택시 기사에게 가한 폭행과 욕설 수준이다. 법무부 법무실장을 지내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초대 처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된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다.

더 충격인 건 이런 영상의 존재를 알면서도 반년 넘게 법무부 차관직을 수행한 점이다. 백번 양보해 사건 당시 제대로 보고가 안 됐다 해도 경찰 수사과정에서 영상이 드러났는데도 사퇴시키지 않은 이유를 가늠하기 어렵다.

택시 기사에게 1000만원을 주고 영상 삭제를 요청해 증거인멸 교사 혐의를 받는 이 전 차관은 “술에 만취해 사람과 장소를 착각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블랙아웃’에 가까웠다는 해명인 셈이다.

블랙아웃은 기억 일부를 지운다. 대학생 손정민씨 사망사건에서 보듯 블랙아웃 상태에서 벌어진 일은 곳곳에 설치된 CCTV를 통해 복원이 가능하다. 이 전 차관의 경우엔 택시 블랙박스가 기사의 목덜미를 잡고 욕을 하는 이 전 차관의 얼굴을 크게 잡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코로나19 감염자가 내뿜은 비말이 다른 사람의 눈ㆍ코ㆍ입에 떨어져 전파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특히 6피트(약 1.8m) 이내에 있는 사람이 감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경고했다. 이 전 차관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택시 기사 코앞에서 욕설을 하는 영상은 오싹하다.

택시 기사에게 거액을 주고 무마한 지 한 달도 안 돼 청와대의 법무부 차관 제의를 덥석 받아들인 선택은 의아하다. 차관이 되자마자 택시 기사 폭행 의혹이 터졌음에도 6개월을 버틴 이 전 차관과 수사 경찰, 청와대 사이에 어떤 내막이 있는지도 블랙아웃 상태다.

수사권을 갖게 된 경찰이 오랜 수사로 모처럼 묵직한 팩트를 찾아냈다. 당시 서초경찰서 경찰관들이 이 전 차관이 공수처장 후보군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서울경찰청에 보고한 내용도 파악했다. 분명한 성과다. 반면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 전 차관 사건을 상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한 전직 고위 경찰 간부는 “이런 사건은 수사 부서는 수사 쪽에, 생활안전 담당은 생활안전 라인을 통해 상부에 전화 보고라도 하는 게 상식”이라며 “공수처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연루된 사건을 보고조차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청와대 검증 과정도 규명이 필요하다. 청와대의 고위공직자 검증서에는 범죄 경력과 관련해 본인과 배우자 또는 자녀가 형사처벌 받거나 재판이 진행 중인지를 쓰게 돼 있다. 공소권이 없거나 무혐의ㆍ기소유예ㆍ각하 등 불기소 처분도 적어야 한다. '예' '아니오'로 답하기 어려운 사안을 고려해 ‘추가 확인 필요’라는 항목도 만들었다. 장ㆍ차관은 물론 1급 후보자에도 적용하는 기준이다. 이 전 차관이 솔직하게 답했는지, 청와대가 알고도 임명을 강행했는지가 핵심이다.

이용구 전 법무차관 [연합뉴스]

이용구 전 법무차관 [연합뉴스]

판사 시절부터 이 전 차관을 봐온 법조인 중엔 그의 능력과 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꽤 된다. 그들은 이 전 차관이 왜 이런 처신을 해왔는지 안타깝다고 말한다. 우리 편이라면 웬만한 허물쯤 덮고 뭉개는 ‘불공정 증후군’이 그를 변질시킨 게 아닐까.

이 전 차관의 폭행이 발생한 지난해 11월 이후 7개월의 블랙아웃을 재구성해야 한다. 스스로 공수처장 후보로 거론됐음을 밝힌 그를 청와대가 법무부 차관에 보낸 이유가 인사청문회를 피하기 위한 고육책은 아닌지 의혹이 꼬리를 문다. 7개월의 시간을 복원해 반성하지 않으면 ‘피고인 지검장’을 ‘피고인 고검장’으로 승진시킨 권력의 ‘정의 결핍증’은 불치병이 된다.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joo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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