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1부 독립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는 늘 김찬기의 성공을 빌며 무사귀국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희망에 차 있었다. 1945년 4월10일이었다. 나는 정봉식의 은신처를 찾았다. 그런데 그 집 안주인은 나를 보자 정봉식이 며칠 전에 경찰에 잡혀갔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정봉식의 어머니가 진주에서 올라왔는데 사위도 잡히고 그 외 또 한사람 등 네 사람이 잡혔다고 하더라고 알러주었다.
사위라는 것은 김찬기의 동생 형기고 그 외 또 한 사람은 하태가 틀림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이 이상 더 서울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 이튿날 경성역을 피해 영등포까지 가서 그곳에서 기차를 탔다. 강원도 건봉사로 피하려했으나 그곳으로 가면 정보를 수집할 수도 없고 집과 연락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지리산으로 가기로 했다.
12일 진주 옆 개양역에서 기차를 내려 걸어서 진주로 들어갔다. 남강철교 다리목에 부산일보지국이 있었다. 거기에 기자로 있는 강태열의 동생 강대구를 만나 강태열에게 연락을 하려했으나 부산에 가고 없었다. 마침 벽을 보니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죽었다」는 것과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다」는 벽보가 붙어있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으면 3개월 이내로 구주나 조선 남해안에 상륙해올 것이라 생각되었다. 진주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자면 제일 빠른 길이 덕산을 통하는 길인데 덕산으로 가지 않고 함양으로 갔다. 함양에서 마천으로 들어갔는데 마천에 가니 날이 어두웠다. 당시는 식량이 귀해 밥을 얻어먹기가 어려웠다. 구장 집을 찾아갔다.
나는 『함양 군청에서 왔는데 하루 밤 자고 가야겠다』고 집안에 들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잘 수도 없고 밥도 얻어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등잔불을 켜고 밥을 먹는데 구장이 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내가 군청에 자주 다니는데 얼굴을 못 봤는데요』하고 의심했다. 『아! 그럴기요. 며칠 전에 거창군에서 전근되어왔으니…』라고 둘러대고 태연히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새벽에 일어나 그 집을 떠나 백무동으로 향했다. 산중에 목기를 만들고있는 집이 몇 채있었다. 거기서 돈을 주고 보리밥 한 그릇을 사먹고 개떡을 몇 개 사 가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니 구주제대시험림이라 쓴 말뚝이 보였다. 큰 바위 밑에 서울서 가지고 온 담요보따리를 감춰놓고 목기집에서 얻어온 나무몽둥이를 들고 지형을 살피러 나섰다. 산 고개를 하나 넘으니 개울이 있었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니 뜻밖에 솥을 건 자리가 있고 돌이 연기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반드시 사람이 있다고 짐작했다. 조금 떨어진 바위 밑에 숨어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저녁때가 되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솥을 들고 개울물에 가서 씻더니 연기에 그을린·돌에 걸고는 불을 때고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그들의 등뒤로 접근해갔다. 그래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나무 몽둥이를 단단히 쥐고 『뭐하고있나?』하고 말을 걸었다. 그들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고는 무릎을 끓고 『살려주소』 하고 애걸하는 것이었다. 내가 공무원복강을 하고있으니 군청에서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제 미군이 일본에 상륙했다. 석 달 후에는 부산·삼간포로 상륙해온다. 우리가 독립하자면 미군과 연합해 일본과 싸워야한다』고 나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나는 독립을 위해 지리산에 들어온 사람이다. 지금부터 자네들과는 같은 동지다』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자 한사람이 머리를 들며 『우리가 여기 숨어 있는 줄 우찌 알았습니꺼?』하고 물었다. 『나는 이 세상일을 다 알고 있다. 우리조선이 석 달 후에 독립한다는 것 도 아는데 자네들이 누군지를 모르겠나?』하고 짐짓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그들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우러러보는 것 같았다. 그들이 지은 밥을 같이 먹고 밤늦도록 까지 정세를 이야기하며 일본이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한다는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들은 징용을 피해온 사람들이었다.
그 후로도 징용을 피해 식량을 지고 지리산으로 은신해오는 청년들이 있었다. 한 달 동안 산 속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모아 정치교양을 했는데 모두 8명이었다.
산에 들어 온지 한 달이 넘어 돈도 떨어지고 바깥정세도 궁금해 진주로 나가 봤다. 예상외로 정봉직·하태·김형기 등이 석방되어 나와있었다. 봉식 어머니가 논을 팔아 막대한 뇌물을 주고 석방운동을 한 결과였다.
우리는 여기서 정식으로 독립동지회를 결성했다. 정 등 3명과 이우낙·강대열, 그리고 나 6명이 중앙위원, 내가 지리산에서 조직한 8명, 이우낙이 조직한 3명 등 모두 17명이었다. 대표는 내가 되었다. 나는 진주에서 돈과 식량과 생활용품을 구해 가지고 산으로 다시 들어가 실전에 대비해 본격적인 격투 술 훈련을 시작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