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보다 자유가 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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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곳곳서"장벽을 허물자">
○…베를린 장벽이 철폐된 뒤 첫 주말을 맞은 서베를린시는 축제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도시어디서나 자유를 만끽하며 거리를 거니는 1백여만명의 동독인들과 이들을 환영하는 서독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든 브란덴부르크문 주변 장벽과 거리에는 수천명의 인파가 북적거리고 곳곳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으며 장벽이 세워진 53년6월17일을 기념, 문으로 통하는 거리에 명명된「6월13일가」는 국경철폐조치가 발표된 날을 따라「11월9일가」로 개명(?) 한다는 플래카드가 시민들에 의해 내 걸리기도 했다.
국경경비대원들은 장벽 위에 늘어서 시민들이 장벽에 구멍을 뚫지 못하도록 저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장벽을 허물어야한다』는 시민들의 외침은 더욱 높아져갔으며 특히 청년들은 장벽주변과 시내 곳곳에서 자연스레 한데 어울려 춤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인파 처음〃>
○…일요일인 12일 오후2시(현지시간)서베를린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쿤담거리는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 대부분이 동독과 동베를린에서 온 사람들인 것은 물론이다.
쿤담거리 한 복판에 우뚝 솟은 게데스텐니스교회 앞에서 만난 스티필러노인(62) 은『50여년을 베를린에서 살았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를 본적이 없다』면서『언젠가 열릴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북이걸음을 하는 자동차들 중에는 서베를린 차보다도 동베를린에서 온 차들이 더 많은 듯 했다. DDR(동독)이라고 적힌 국적표시스티커를 보면 동독에서 온 차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만 그걸 보지 않더라도 차의 생김새만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대부분 낡고, 소형인 트라반트나 바르트비르그(동독제)아니면 소련제 라다이기 때문.
남루한 옷차림과 헝클어진 머리로 서베를린사람들과 쉽게 구별되는 동독인 방문객들은 자동차 전시장·가전제품상을 비롯, 현란하게 치장된 상점들의 쇼윈도 앞에 늘어서 동독에서 보지 못한 갖가지 상품들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함부르크건에서는 일부 동독인들이 홍등가를 방문, 섹스 상품점과 매춘부들이 사는 거리를 기웃거리기도 했으나 호기심만을 보였을 뿐 실제 거래는 거의 없었다.
○…중심가 고급백화점인 카데베백화점이나 베아르하임백화점 앞에는 신기한 눈으로 쇼윈도를 바라보는 동독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고, 일요일이지만 간간이 문을 연 간이음식점이나 상점에는 간단히 요기를 하거나 물건을 사는 동독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은행 휴일도 없이 바빠>
○…서베를린으로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권하나만 달랑든 채 빈손으로 온다. 살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잠시 구경하러오는 것이기 때문.
그동안 담장너머로 구경만 했지 지척에 있으면서도 가 볼 수 없었던 서베를린.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싶다는 호기심에서 일이 없는 주말을 이용,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단 서독에만 오면 동독인이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서독 돈으로 1백마르크(약3만6천원)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유인 듯 했다. 서베를린 내 각은행은「89년 중 처음으로 서독에 온 동독인」이라는 것만 확인하면 무조건 1백마르크씩 나누어 주고있다.
은행마다 수백m씩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초 서독정부가 직접 나눠줬지만 워낙 넘어오는 사람이 많다 보니 각 은행에 위임했고, 토요일과 일요일도 없이 각 은행은 전직원이 출근, 돈 나눠 주기에 정신이 없었다.

<"알주일 후 또 올 생각">
○…베를린 분단의 상징처럼 돼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으로 향하는 비스마르크가는 구경나온 동·서독사람들로 인파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장벽은 그대로 남아있고, 장벽너머에 우뚝 선 브란덴부르크문 앞에는 여전히 동독보포 (인민경찰의 약어)들이 지키고 있지만 장벽 이쪽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환호하며 국경개방을 기념하고 있었다.
○…아내와 딸아이의 손을 잡고 인파에 섞여있던 루터 볼프강씨(48)는 『그동안 동베를린쪽에서 서베를린만 보아왔는데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을 바라볼 줄은 몰랐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3식구가 받은 3백마르크로 큼직한 소니카셋라디오까지 장만한 볼프강씨는『오늘은 이만 보고 돌아가 일을 한 뒤 일주일 후 또 올 생각』이라며 동베를린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것은 시작에 북과">
○…동베를린의 명문 홈볼트대학에 다니는 스겐프라이군은 인파에 묻혀 시내곳곳을 여기저기 쏘다녔다.
브란덴부르크문이 바라보이는 베를린장벽 앞에서 서베를린 시민들 틈에 끼어 장벽건너편에 있는 동독경찰들을 구경하기도 했고, 베를린장벽을 넘다 숨진 동독인 79명을 위해 서독사람들이 장벽앞에 만들어 놓은 나무십자가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는 동독 돈1마르크를 내고, 서독 돈으로 1마르크씩하는 슐트하이스맥주도 마셔봤다(국경개방을 기념하는 뜻에서 한 맥주회사가 1대1환율로 동독 돈을 받고 맥주를 팔고있음). 밤에는 디스코테크에 가 서독 젊은이들과 어울러 밤새워 춤도 추었다.
『TV로나 보고, 말로만 듣던 서베를린에 직접 와 이렇게 어울려 놀고 떠들 수 있다는게잘 믿어지질 않아요』
프라이군은 지난주 초 동베를린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외에도 참가했었다.
『국경완전개방조치로 더 이상의 엑서더스사태는 없을 것 같다』고 전망하는 프라이군은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폴란드처럼 자유선거가 실시돼야 하고, 언론의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경전면개방만으로도 크렌츠서기장은 큰일을 한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아직은 판단하기에 이르다』며 『좀더 두고봐야 한다』고 대답한다.
프라이군은 동·서독 통일문제에 대해『통일이 나쁠 것은 없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며『그것보다는 풍요롭고 자유롭게 사는 게 동독으로서는 우선 절실한 문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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