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펄럭이는 민족주의 깃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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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일 오후 일본 도쿄 도호빌딩에서 열린 영화 '일본침몰'기자회견장에서 히구치 신지 감독과 주연을 맡은 구사나기 쓰요시(左)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코어스튜디오]

한국에 '한반도'가 있다면 일본에는 '일본 침몰'이 있다?

영화 '한반도'(감독 강우석)가 노골적인 반일 정서에 기댄 작품이라면 오는 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일본 침몰'(감독 히구치 신지) 또한 배타적 민족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최근 양국의 정치적 상황과 미묘하게 맞물려 논란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일본 열도가 바닷속으로 침몰한다는 가상 상황을 그린 이 재난 영화는 20억 엔(약 170억원)이라는 일본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화제작. 7월 15일 개봉한 뒤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계속 흥행 상위권(현재 3위)에 머물고 있다. 1973년 발표된 동명 소설이 원작이지만 일본 침몰이라는 기본 설정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은 많이 다르다.

재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거부감을 느낄 만한 장면이 몇 대목 있다. 우선 미국 등 주변 국가들을 배신자 취급하며, "결국 믿을 것은 우리 일본인뿐"이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를 던진다. 특히 한국과 북한은 일본인 난민에게 불법 입국자라는 딱지를 붙여 추방하는 '나쁜 이웃'으로 묘사돼 있다. 한국의 실제 반일 시위 모습 등도 다큐멘터리 식으로 편집해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겐 반일 시위가 일본의 전쟁 책임과 사과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집단이기주의 표현으로 비친다.

히구치 감독은 "일본 내 장면에 집중하다 보니 외국과의 관계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못 썼다. 예산 부족으로 해외 촬영이 어려운 것도 문제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만일 한국에서 개봉하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몇 군데는 수정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가 비상사태에서 자위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설정도 문제다. 일본 방위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촬영한 이 영화는 육.해.공 자위대가 총출동해 재난 극복에 앞장서는 모습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자칫 자위대의 강화를 통한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긍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우려된다. 자살 특공대로 악명 높은 가미카제식 해결법도 엿보인다. 남자 주인공 오노데라는 일본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무모한 작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일본 정부는 사건 해결 직후 그를 영웅으로 떠받든다.

오노데라는 국내에서도 '초난강'이라는 이름으로 인기가 높은 아이돌 밴드 '스맙(SMAP)'의 멤버 구사나기 쓰요시(32)가 맡았다. 여자 주인공 레이코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메종 드 히미코' 등으로 잘 알려진 시바사키 코(25)다. 주제가 'Keep Holding U'는 한국의 선민(19)과 일본의 구보타 도시노부(41)가 함께 불렀다.

영화는 재난.폭파 장면에서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전국의 화산이 일제히 용암을 내뿜고 대지진으로 도쿄 도심이 붕괴한다. 교토와 나라의 귀중한 역사유물은 물에 잠겨 사라진다. 그러나 드라마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어서 일본 네티즌들의 평가는 썩 좋지 않다. 야후 재팬에서 네티즌들이 매긴 별점은 5점 만점에 2.7점에 머물렀다.

도쿄=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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