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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수산이 본 11억인의 나라(하)개방물결 상해에 선인의 숨결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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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중국민항(CAAC)은 하나의 회사가 아니다. 87년 말 6개의 회사로 분리되었다. 상해∼서안간을 내가 타고 내린 중국 서북항공공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다만 혼란을 막기 위해 당분간 중국민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에서 중국 사람의 「천천히 천천히」하는 만만디(만만적)가 느껴진다.
탑승기념으로 승객들에게 나누어주는 비닐백이며 은색지갑까지 받아가면서 내린 상해에서 내가 제일 먼저 중얼거린 말은 『아 상하이에는 색깔과 치마가 있구나』하는 감탄사였다.
오늘의 중국은 무채색이다. 거리의 여기저기에 내 걸린 붉은 글씨의 구호나 금빛 간판 뿐 우선 사람들의 옷에 색깔이 없다.
짙은 감색이나 회색이 거리를 뒤덮는다. 인민해방군의 그 진연두빛 제복이 오히려 화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여행객의 입장에서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스커트차림의 여자를 본다는 건 그 날의 행운에 속한다. 여자도 거의가 바지차림이다.

<젊은 연인들 활보>
화사한 모드의 여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스쳐가고 어깨를 안은 젊은 연인들이 오가는 거리 상해. 그러나 이 도시는 한때 중국의 치욕이었다.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나면서 남경조약이 맺어지고 영국의 조계를 시작으로 미국·일본·프랑스의 조계가 들어서면서 그 땅이 갈가리 찢기고, 제 나라 땅이면서도 「개와 중국인은 들어올 수 없다」는 팻말이 붙는 운명을 백여년 감수해야 했던 상해다.
그 과거의 흔적은 아직도 살아있어 옛 조계지에 따라 각 국의 체취를 풍기는 건축군이 전시장처럼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프랑스의 조계지였던 거리, 건물과 플라타너스가로수와 담쟁이덩굴이 기어오른 벽이 아직도 우아하다.
상해는 또한 우리의 현대사와 무관할 수 없는 땅이다. 이 거리, 저 모퉁이… 역사의 흙더미서 조금만 파헤쳐도 우리 선인들의 발자취가 선연하게 드러난다.
상해 사람들은 「남경로에서먹고 회해로에서 입는다」는 말이 있다. 중국 최대의 번화가인 이 두 거리의 특색을 보여주는 말이다. 또한 회해로가 「서민의 거리」로 불리는 반면 남경로는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의 7할이 「서울구경 올라 온 촌사람들」로 통할 정도로 외지 사람들의 쇼핑장소다.
이 거리, 회해공원에서 상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회해중로를 따라 서쪽으로 세 블록을 가면 마부로가 나온다. 붉은 벽돌집이 유난히 눈에 띄는 길이다. 이 마당로306의4번지가 상해임시정부의 옛 자리다. 이동령 선생이 계약을 하고 김구 선생이 회의를 진행하곤 했다는 이 건물은 현재 중국인 주선기씨의 주택이다.
1928년 이후 임시정부는 재정궁핍으로 인하여 월35달러의 집세가 6개월이나 밀리는 어려움에 빠졌었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고자 남경으로의 이전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임시정부는 만주의 참의부·신민부 등의 월50달러 내외의 송금에 의하여 유지되기도 했으며, 안창호 선생이 마닐라에 가서 현지동포의 자금송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니(일제의 <고등경찰요사>) 나라 잃고 이국에서 절치부심하던 지사들의 흉중이 어떠했으랴!
흩뿌리던 빗발이 겨우 갠 아침, 임시정부 구구적지로 찾아드는 길에는 출근길의 자전거 행렬이 물결을 이루며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마당로로 꺾어드니 좁고 지저분한 골목에는 앞 건물과 가로질러 널어놓은 빨래가 보인다. 306의4번지. 문패도 선명한 그 집에는 그러나 주인이 외출 중이었다. 옛 분들의 숨결을 느낄 그 무슨 유품이 이곳에 남아 있으랴마는. 망국의 한을 독립에의 긍정으로 환치해 갔던 그분들의 열정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자리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방명록 준비해 둬>
동경에서 접한 C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주선기씨는 최근 찾아오는 한국방문객을 위해 방명록을 준비해 두고 있다고 한다.
『금년 여름에는 특히 한국의 대학생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뜨거운 정열로서 자신의 조국과 먼저간 애국지사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며 늘 감동을 받곤 합니다.』
내 나라의 젊은이들이 이 이국의 골목에서 목놓아 부르고 갔을 애국가며 저항가요를 생각하며 돌아서는 골목길에서는 노브라의 여인이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무심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서 있었다.
역사 속에 추연해졌던 몸을 돌리며 여기가 상해임을 새삼 생각한다. 기록에 의하면 임시정부가 사용했던 곳은 여러 곳이 보인다. 회창로329호 뿐만 아니라 금신부로·역비로·협평리 등에도 있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들 장소가 한결같이 프랑스의 조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무렵 일본은 자신들의 조계 안에 미쓰이 백화점 지점이며 조선총독부 경무국 출장소까지 두고 있었다. 이 일본이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프랑스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벗어나려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여러 가지 배려를 했던 것이다. 망국의 그늘진 역사에는 이런 열강의 파워게임 그림자도 있는 것인가.
홍구공원에는 작가 노신의 묘소가 있다. 공원의 한가운데 원형으로 된 잔디밭이 있고 그 뒤편으로 잘 단장된 묘소가 이 작가에 대한 중국인의 존경을 말해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의사 윤봉길의 1933년4월29일 홍구공원 의거로 기억되는 자리다. 자신에게 스스로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주고 홍구공원을 향해 떠나가는 윤봉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김구 선생이 『간다! 대한남아 윤봉길이 가는구나!』하고 단장의 배웅을 했던, 젊은 날 읽은 『백범일지』속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며 그의 의거지를 찾아가 섰다.
노신묘라고 새긴 석판이 있는 곳에서 잔디밭을 향해 똑바로 설 때 왼편으로 45도 각도로 19m가 되는 지점. 그곳이 기록에 의하면 정확하게 윤의사의 거사지점이 된다(총독부의 <윤봉길사건 전말서>).
그가 일왕의 생일 기념행사장에 폭탄을 던졌던 그 자리에는 이제 곱게 기른 잔디만이 푸르렀다. 노신의 묘소를 둘러싼 숲에서는 새가 울고 있었고 상해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태극권으로 몸을 단련하느라 열심이었다.
일요일이어서 공원은 사람들로 붐볐다. 노신 묘소를 지나 공원을 나서던 길에서였다. 내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가던 어린아이가 들고 있던 작은 북 모양의 장난감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집어주는 나에게 아이의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서툰 일본어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카메라를 둘러멘 내 모습이 영락없는 일본인 관광객이었을까. 윤의사여, 님은 아시리라. 그때 거기서 내가 그토록 부끄러웠던 까닭을.

<김가항성당 수리>
상해 중심가를 벗어난 택시가 연안동로 터널로 황포강을 건너자 이내 주변은 한적해 진다. 길가의 건물들 뒤로 밭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교외다. 차를 세우고 길을 묻기를 여러 번 오던 길을 되돌아가 좌회전을 한 차가 10여분을 달려가 닿는 장고로, 거기에서 다시 우회전을 하여 좀은 비포장의 길을 백여m 들어가서 선다. 비닐하우스와 새로 지은 아파트, 정미소 건물이 스러져가는 저녁햇빛을 받고 서 있다.
한국 가톨릭의 성지. 김대건 성인이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은 김가항성당이 조그맣게 바라보인다. 상해시 양경향 대금가항82호.
성당은 지금 수리 중이었다. 문 앞에는 자갈과 모래더미가 아직 쌓여 있고 성당 안은 칠공사가 막 끝난 상태로 페인트 냄새가 아직 남아 있다. 감실이며 제대도 옆방으로 옮겨져 있다. 기둥뿐이 텅 빈 성당 안, 흐르는 눈물 속에서 열리지 않는 창문 유리저편으로 감실을 확인한다. 동행한 수녀와 함께 부르는 『김대건 신부 노래』가 5절까지 이어진다.
「해지는 만리장성 돌 베개 삼아 자고/숭가리 언저리에 고달픈 몸이어도/황해의 노도엔들 꺾일 줄 있을소냐/장할 손 그 뜻이야 싱싱히 살았어라」.
성당관리인에게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이 가져온 기념동판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관리인과 우리를 안내한 중국인 H씨의 중국어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 택시기사가 두 사람의 중국어를 또 다른 중국어로 통역한 끝에야 겨우 그 동판이 관리인의 창고 안 부대자루 더미한쪽에 보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리인은 성당의 수리가 끝나는 대로 소중하게 붙여놓을 것이라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어둠 속에 시내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1845년8월17일. 그분이 여기에서 신품을 받은 지 1백50여년이 지나 … 내일은 그의 대축일이었다.
다른 어느 도시와는 달리 상해는 「사람들의 거리」다. 어느 축제의 도시가 이럴까 싶게 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의 물결을 바라보자면 「나까지 여길 왔으니…」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오늘의 상해는 한때의 늙고 쇠약했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다른 도시와 달리 개혁·개방정책의 충격을 가장 심하게 받아야했던 도시로서 더욱 그러하다.

<개혁 향해 몸부림>
80년대 중반 이미 상해의 98% 중소기업 공장건물은 노후해 있었고 그중 60%의 건물은 위험한 상태였다. 20%의 공장시설이 건국 이전의 것이었다 (『금일중국』 88년11월호). 그 결과 상해는 그동안 지켜온 공업총생산량과 수출액의 수위자리를 강소성과 광동성에 양보해야 하는 충격에 빠졌다.
노후한 설비와 자원의 결핍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상해는 먼저 넓은 공장부지를 찾아 다른 지역과의 연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제일 먼저 새로운 공장과 설비를 다른 성이나 시와 연합함으로써 국제경쟁력까지 갖추게된 회사가 유명한 「봉황표」자전거 공장이다.
한편 자원의 결핍읕 상해는 해외의 기술을 과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보완해나가고 있었다. 『국외의 선진기술을 소화하는 것은 자체로 연구 개발하는 것보다 시간과 자본을 80%나 절약할 수 있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연평균 20%의 신장률을 보이고 있는 관광수입도 상해가 기대하는 개혁·개방 속의 한 얼굴이다.
상해의 거리 이름은 특이하다. 남북으로 뻗은 거리는 중국의 각 성 이름이며 동서로 걸쳐진 거리는 각 도시의 이름이다. 사천로와 연안로가 만나고, 복건로와 북경로가 로터리를 만든다. 이것도 이 거대한 나라가 가진 한 화해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거대국토와 다민족의 동화정책. 우리는 어떨까. 광주에 대구로가 생기고 부산에 가로수 아름다운 목포길이 트인다면. 그 길에 각 도시를 상징하는 꽃나무를 심어도 좋으리라.
이국 땅에서 느끼는 이 화해의 한 방법은 다만 덧없는 것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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