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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 지식인의 고뇌|민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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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에 뜻밖에 한 일본인연구자로부터 국제전화로 내가 여러해 전에 한글로 써서 발표한 채원배에 관한 논문을 일역하여 발표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동의했더니 이윽고 중국연구 학술지에 번역·발표된 별쇄본을 보내왔다. 번역의 됨됨이도 볼겸 그 논문을 다시 읽어보면서 채원배의 시대적 고뇌를 반추해 보았다.
1868년에 태어나 1940년 타계할때까지 중국근현대사의 격동의 시기를 살다간 그는 5·4운동 정신적 지도자의 한사람이었고 당시 북경대학총장으로 학생·지식인의 숭앙을 한 몸에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채원배의 일생>
그는 사상가이기에 앞서 탁월한 교육자였다. 관리지망의 풍조로 가득차 북경대학의 분위기를 일신하여 학생들에게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갖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도록 길러주어 결과적으로 5·4운동을 일으킨 그였으나 학생운동과 정치행동의 엄정한 독립을 교육의 신조로 삼은 기골있는 교육자이기도 했다.
이 같은 채원배의 이미지는 1927년 국민혁명의 회오리 속에 부각된 그의 반공적 입장으로 일전한다. 친공적인 국민당좌파정권을 반대하여 장개석의 반공정권을 탄생케 한 산파역을·그가 맡고 나섰던 것이다. 민중운동에 억제적인 장개우정권에 법적 정통성을 부여하는데 앞장섰던 그는 그러나 맹목적으로 반공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의 과격한 정책을「과도한 진취」의 뜻인「악화」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그가 지지하고 있는 장개석정권에 대해서도「보수가 지나치면 부화가 된다」고 경고함을 잊지 않았다. 악화와 부화를 다같이 비판하는 중용적 입장을 채원배는 취했던 것이다. 그 같은 중용적 입장이 격동하는 시국을 앞서가려 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는 물론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1931년에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는 신일♀인 유조구사건이 발생하자 수 만명의 학생들이 전국각지에서 수도인 남경으로 몰려와 일본에 대해 즉각적으로 항전할 것을 요구했다. 채원배는 이들 시위대 앞에 몸소 나가 『학업을 희생하는 것은 국토를 빼앗기는 것과 같다』고 맞섰다.
채의 발언을 즉시항전을 머뭇거리고 있는 장개우정부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으로 본 학생들은 국민적인 존경의 대상인 그 늙은 교육자를 구타하기에 이르렀다. 놀라운 일 이었다. 학생들에게 구타당한 채원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주장은 변함 없다고 하면서도 국민들이 학생들을 사랑해 줄 것을 호소해마지 않았다.
채원배의 이미지는 다음해 1932년에 가서 또 한번 전변했다. 장개석정권의 강압적·군사적 지배가 날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정부에 맞서 민권(인권)보호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는 국부로 숭앙받는 손문의 미망인 송경령, 저명한 문필가인 임어당 등과 더불어 중국민권보장동맹을 만들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장개석정권은 공산당과 일본군의 위협을 동시에 받아 스스로의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 반정부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인권탄압에 점차 반기>
비밀군사재판과 사형이 함부로 자행되고 있었고 「민국에 위해를 가하는 활동을 긴급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 인권탄압을 자행했었다. 민권보장동맹은 정부의 인권탄압에 항거하면서 인권탄압피해자구원 활동도 적극 펴나갔다.
그 구원대상의 대부분은 공산당원 또는 공산당의 동조자였다. 어제의 「반공의 대부」가 결과적으로 친공이 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채원배의 태도 변화를 두고대만과 중국·일본 학자들의 평가는 서로 달랐으나 양쪽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행동만을 강조, 부각시키고 불리한 것은 무시하거나 소홀하게 다루는 아전인수적 태도인 점에서는 동일했다. 일본인 연구자가 번역한 나의 그 논문은 이 같은 아전인수적 해석에서 떠나 채원배 행동의 기저에 일관되는 중용적 태도가 있음을 논증한 것이었으니 채원배의 민권보장운동은「보수의 부화」를 반대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국 자유주의사상의 중심 된 존재요, 1927∼28년 당시 홀로 인권보호를 주장한바 있던 호적도 그 민권보장동맹의 북경지회를 만들어 참여했으나 얼마 안 가서 채원배 등의 본부와 견해가 대립되어 끝내는 본부로부터 제명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립은 본부측이 민권운동의 일환으로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한데서 비롯하였다. 호적의 생각으로는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은 인권운동의 차원을 벗어난 것이었다. 한 정권은 스스로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행동을 억압하는 정권보장의 권리가 있다고 그는 단언했다.
채원배와 임어당·송경령 등 민권보장동맹 본부측 사람들은 호적의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마침내 그를 제명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제명이유는 정치범의 석방과 인권보장운동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호적과 입장을 달리한 채원배는 호적이 말한 것과 같은 일반적인 정권보장 그 자체를 부인했을까.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기가 만든것이나 다름없는 장개석 정권의 정권보장을 부인하면서까지 인권보장을 주장했을까.
정권보장과 인권보장이 충돌되지 않는 길은 없었을까. 채원배에게 있어 인권보장과 정권보장이 충돌되지 않는 길은 개개 정권의「악화」나「부화」의 정도에 달려있었다. 장 정권이 「부화」의 극을 가지 않고, 달리 말해 민주화로써 정통성을 확고히 했었다면 응당 정권보장은 용인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완전한 정통성, 완전한 민주화란 없는 것일 터이므로 어느 정도의 정통성, 어느 정도의 민주화를 채원배는 정권보장인정의 요건으로 보았을까.

<「중용의 원칙」고집>
아마도 자기와 같은 「중용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정도의 것으로 보지 않았을까. 채원배의 경우를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지 한중국현대사연구자로서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중국사의 경우만 갖고 역사적 인식을 일반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대 교수·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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