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 변화 때마다 "출장"|김일성 해외나들이 어떻게 해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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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북한의 김일성은 48년9월9일 정권수립이후 소련·중국·동구 및 비동맹국가들을 상대로 약 20여차례에 걸쳐 순방외교를 벌여왔다.
60년대 전반까지 김의 해외방문은 주로 북한의 사회주의건설 및 전후복구와 관련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얻기 위해 중소로 집중된다.
즉 김일성은 정권수립직후인 49년3월 한 달 남짓 동안 소련을 방문, 6·25남침문제를 협의하는 한편 소-북한 10개년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했다.
김은 또 휴전협정이 체결된 53년9월에 소련을 다시 찾아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협정을 체결한데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중국을 방문, 전후복구문제 및 제네바회담에 대비한 전략회의를 가졌다.
김은 또 56년6월 소련을 비롯한 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알바니아·폴란드를 49일에 걸쳐 순방하면서 경제지원을 요청한데 이어 58년11월에는 중국·월맹을 찾아 반미공동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60년대 초반까지 김의 방문외교는 중소에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61년6월 소련을 방문한 김은 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0월 소련공산당 22차대회에 참석했다.
김은 이해 두 차례의 소련방문 중간에 중국도 찾아 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두 강대국으로부터 「보장」을 받아놓았다.
김의 방문외교는 60년도 후반에 들어서는 보다 다양화됐다.
이는 김이 중소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자주노선」을 천명한데 따른 것으로 김은 종래의 대중·소위주 외교에서 벗어나 제3세계 외교에 신경을 썼다.
우선 제3세계국가 가운데 인도네시아를 64년11월 방문한 것을 시발로 75년5∼6월의 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아·불가리아·유고 등의 친선방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의 자주외교도 그의 제3세계권에의 다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소 중심은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의 흐름이 격변할 때마다 김은 중소를 방문,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강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75년4월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들 수 있다.
김은 이때 연설에서 월남전에서 미국의 패전에 고무되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잃는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호언한 것은 기억에도 새롭다.
김은 80년도에 들어선 국제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요인이외에 김정일 세습을 중소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즉 82년9월 중국을 방문, 덩샤오핑(등소평) 등과 회담, 김정일 세습 체제의 인정 및 중국영향력에 편승한 비동맹외교기반 강화를 도모했다.
또 84년11월말과 85년12월에 각각 중국으로 가 남북대화 재개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 두 차례의 방중은 비밀리에 이루어져 김의 방문이 끝난 후에야 알려지기도 했다.
김은 그동안 중국에 기울어진 정책으로 소원해진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공식적으로는 23년 만에, 비공식적으로도 23년만인 84년 5월 소련을 방문, 체르넨코 서기장과 회담을 가졌다.
김은 여기서 소련으로부터 MIG29등 신예기 도입을 비롯한 군사원조와 김정일 세습인정을 요구했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은 그 후에도 대중·소등거리외교를 계속 추구, 86년10월말에는 소련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87년5월말에는 중국에서 등소평과 각각 회담을 갖고 주변정세를 논의했다. 그러나 이제 김일성의 화려한(?) 나들이도 종말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소련·동구권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개편으로 냉전구조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천안문사태이후 고립을 면치 못해온 중국을 이번에 비밀리에 방문한 것은 그만큼 변화를 거부해온 북한의 처지를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희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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