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결핍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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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베를린 장벽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민주화 개혁의 거센 바람이 동구 전역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지난 주말 동베를린에서는 1백만명의 시민들이 동서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 부근에 집결, 현정부의 퇴진과 정치적 개혁,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지난 6월 북경의 천안문 사태에서도 보았듯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1백만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베를린에서는 그런 「이변」이 일어났다. 그뿐 아니라 이들 시위대는 『인민은 경계의 눈빛을』『진리는 가르쳐지는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공산당이 아니라 바로 인민이 동독의 변화를 시작했다』는 플래카드를 높이 쳐들고 있었다. 바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여름 이후 수만명의 동독 국민이 서독으로 탈출함으로써 호네커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등장한 크렌츠 서기장의 개혁 약속에도 불구하고 동독 국민은 지도자들의 「말」보다 「행동」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동독의 지도자들은 올해 들어와 두가지 문제로 국민들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하나는 국민들의 대거 탈출 소동이다. 그들의 탈출 동기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상처는 더욱 심각하다.
서독 정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한결같이 동독에서는 장래의 전망이 없고 생애의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마디로 「일하는 즐거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독 공산당의 복지 경제 정책이 허울좋은 「말」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동독인들이 잠자코 정부의 시책에 따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당과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사태에 대해 동독의 지성 쿠진스키 박사 (동독-소련 과학 아카데미 회원)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결핍에 있다. 관료 체제가 경직되어 사고의 유연성이 상실되고 당과 인민의 대화가 단절되었다. 따라서 지도층의 오만이 팽배해 있다. 거기에다 경제적 위기감마저 가세했다.』
민주주의 결핍증-, 그것은 비타민 결핍 이상으로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현대 사회의 가장 무서운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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