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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의 손은 눈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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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시각장애인용 '즐거운 역사체험, 어린이박물관'이다. '즐거운 역사체험'은 서울 용산에 새 둥지를 튼 국립중앙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 도록. 그 도록의 시각장애인용 버전이 지난주 발간됐다. 뉴스 가치를 따지면 놀랄 게 없다. 단신으로 처리하면 무난할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도록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을 냈다. 국가기관에서 펴낸 '촉각도서(觸覺圖書)' 1호를 기록했다.

촉각도서? 생소하다. 도록에는 신라 금관, 백제 금동대향로, 하회탈 등 문화재 35점이 점자(點字)로 표현됐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설명이 점자로 처리된 것은 물론 각 유물의 형태도 손끝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일반인에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면 시각장애인에겐 '백문이 불여일촉(不如一觸)'이다.

사실 촉각도서는 외국에서 보편화한 양식이다. 헝겊.플라스틱으로 각종 문양을 만들어 붙이거나, 동그라미.네모 모양의 구멍을 뚫어 사물의 형태를 직접 알아채도록 한다. 세계 최대 아동도서 축제인 이탈리아 볼로냐 북페어도 2년에 한 번씩 시각장애아를 위한 특별코너를 마련한다.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시각장애아도 정안아(正眼兒.정상적 시력을 지닌 아이)에 못잖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또 그런 기회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점자도서관 육근해 관장은 "국내에 나온 촉각도서는 20종쯤 된다. 모두 민간에서 만든 것이다. 늦게나마 국가에서 관심을 보여 반갑다. 말로만 듣는 설명보다 촉각을 곁들인 체험은 학습효과에서 70%나 증대된다는 연구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도록을 기획한 국립중앙박물관 박성예 학예사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문화유산을 따라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각장애아의 솜씨가 정안아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시각장애아도 충분한 정보만 제공되면 신체적 약점을 보란듯이 극복해낸다는 얘기다.

문제는 정보격차.지식격차다. 시각장애인의 선천적, 혹은 후천적 결함을 메울 수 있는 정보인프라의 구축이 요청된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멀다. 한국의 시각장애인은 정보의 '생기초'인 책에 접근할 기회조차 꽉 막힌 상태다. 일례로 지난해 국내에선 4만4000종의 신간이 나왔지만 그중 점자.녹음도서는 600~800종에 그쳤다. 또 국가 차원의 시각장애인용 도서관 하나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현재 국회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국립도서관 설치를 포함한 도서관 및 독서진흥법 개정안이 상정돼 있지만 이 또한 올 정기국회에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사람은 눈을 통해 90~95%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시각장애인에게 손은 바로 눈의 역할을 한다. 그들의 손을 놀게 하는 건 일반인의 눈을 앗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근 시각장애인들이 안마사 자격 독점 부여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한강 투신마저 불사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정보와 경험이 빈약했던 그들의 현실에 대한 절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부터 눈은 지혜를 상징했다. 또 손은 문명을 일으켰다. 자비의 대명사인 관음보살이 '천수천안(千手千眼)'의 형태로 자주 나타나는 게 우연은 아니다. 점자책은 그런 눈과 손을 연결하는 최고의 다리다.

돈이 문제라고? 이번 도록은 1000부 제작에 2200만원이 들었다. 일선 출판사에서 점자도서관에 책 원고를 파일로만 제공해도 점자도서는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본문을 별도로 입력하는 수고를 덜게 된다. 우리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란 점에 동의한다면 제2, 제3의 '즐거운 역사체험'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임에 분명하다. '문화 한국'은 별것 아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