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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기사 작위 받은 ‘물방울 선생’ 양고기 요리도 척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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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호 26면

[예술가의 한끼] 김창열

1990년대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화가 김창열. [사진 갤러리현대]

1990년대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화가 김창열. [사진 갤러리현대]

파리 뤽상부르공원 근처, 이름 대신 물방울을 그린 문패가 달린 한 아파트에서 파티가 벌어졌다. 참석자는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 김창열, 백남준, 정상화 부부, 원화랑의 정기용, 현대화랑의 박명자 등 7인.

양다리에 칼집 내 마늘 박아 구워 #파리 아파트 찾은 손님에게 대접 #백남준·이우환·백건우 등 자주 방문 #캔버스 재사용하려 물로 씻다가 #물방울 조형적 아름다움에 꽂혀 #달리가 격려, 세계 미술계 흔들어

백남준(1932~2006)이 피아노 앞에 앉아 ‘봉선화’, ‘가고파’를 연주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연주하는 모습이 왠지 거북했다. 거북함은 잠시였다. 이윽고 선율을 따라 여름날의 봉선화가 애틋하게 피었다가 가을 찬바람에 쓸쓸하게 졌다. 파리 시내 한가운데에 마산 앞바다가 부풀어 오르며 파도가 밀려들었다. 정기용(1932~)은 피아노 연주에 따라 몸과 손가락을 비비 꼬면서 전위적 춤을 추었다. 북방 사나이 김창열은 서도 창법으로 ‘박연폭포’를, 정상화의 부인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를, 박명자(1943~)는 윤복희의 ‘웃는 얼굴 다정해도’를 불렀다. 정상화(1932~)는 조용히 웃을 뿐 끝까지 침묵이었다. 1982년, 파리의 하룻밤은 흐뭇하고 즐겁게 흘러갔다.

이 집 주인은 무슈 구토(물방울 선생)로 불리는 화가 김창열(1929~2021)이다. 김창열은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듬해 평양의 광성고보 4학년생으로 월남했다. 서울대 미대 2학년 때에 6·25전쟁을 맞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전쟁 중에 경찰이 되어 제주도로 발령을 받았다. 전쟁이 끝났다. 월북작가 이쾌대(1913~1965)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그의 복학은 거부된다. 몇 년간 더 경찰에 눌러앉았다. 서울 근처 부평의 경찰전문학교 도서관 한쪽에 방을 마련하여 그림을 그렸다. 도서담당 책임자라는 한직은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기에 좋았다. 주위의 화가 친구들은 다 무일푼이었다. 월급쟁이 김창열이 술값 담당을 맡았다. 서울예고의 교사가 되면서 경찰을 나왔다.

와인 감별법 “비싼 게 가장 좋아”

김창열의 ‘물방울’, 1979~83, 캔버스에 유채, 182.5x228㎝. [사진 갤러리현대]

김창열의 ‘물방울’, 1979~83, 캔버스에 유채, 182.5x228㎝. [사진 갤러리현대]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후 파리에서 석 달을 지내다 뉴욕으로 갔다. 서울대 미대의 스승인 김환기(1913~1974)가 그를 챙겨 주었다.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제2의 고향이랄 수 있는 파리에 터를 잡게 된다.

가난한 화가에게 주어진 아틀리에는 파리 근교 팔레소의 마구간이었다.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되는 마르탱 질롱을 만나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캔버스를 재생할 목적으로 물로 씻어 내다가 햇살을 머금은 물방울의 기막힌 조형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여기에 착안한 물방울 그림으로 1972년 가구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우연히 이 전시를 본 잡지 콩바의 기자 알랑 보스케가 대서특필했는데 그 반향이 컸다.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1943~)가 그림을 구입하고 살바도르 달리(1904~1989)가 전시장을 찾아와 격려했다. 결혼을 반대했던 처가의 식구들은 이 멋진 청년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가족이 되기를 열렬히 원했다.

김창열은 물방울 그림의 성공과 함께 금의환향했다. 도쿄의 도쿄화랑과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완판을 했다. 한국의 최첨단 현대미술을 이끌었으나 경영에는 부진했던 명동화랑을 위해 서울에서 급히 제작한 드로잉들로 갑작스러운 전시를 열었다. 명동화랑의 김문호 사장은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서 큰돈을 만질 수가 있었다. 이로써 미술계의 의리도 지켰다.

무슈 구토가 살던 뤽상부르공원 근처의 노트르담데샹 44번지 아파트는 고위 공무원을 지낸 장인의 아파트다. 3층(프랑스식으론 2층)에는 김창열 가족이, 그 위층에는 쌍둥이인 질롱의 뱃속 자매가 살고 맨 아래층은 월세를 받는 문방구점이었다.

왼쪽부터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관, 서울 화신백화점, 1958년. [사진 갤러리현대]

왼쪽부터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관, 서울 화신백화점, 1958년. [사진 갤러리현대]

파리에 사는 미술인들은 물론 파리를 방문하는 웬만한 한국의 미술인들은 김창열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새해가 되면 세배를 하러 오는 손님들도 적지 않았다. 요리를 내놓아야 했다. 김창열은 양고기로 요리하기를 좋아했다. 양 뒷다리에 칼집을 내어 마늘을 박았다. 올리브유를 거듭 칠하며 구워내었다. 양다리를 거꾸로 들어 자신의 앞가슴 앞에 놓은 다음 첼로를 연주하듯 편을 썰었다. 그의 양고기 요리법은 서울예고 제자이자 파리에서 그의 조수가 된 화가 신성희(1948~2009)·정이녹 부부, 조각가 윤성진·박상숙 부부에게로 전해졌다.

1973년 조각가 심문섭이 처음으로 파리를 찾았을 때, 김창열은 낯선 외국음식에 지친 후배를 위해 자신이 직접 담근 슴슴한 물김치를 내어놓았다. 뱃속에 쌓인 느끼함을 한 방에 확 쓸어 내는 시원한 맛이었다. 청춘을 보낸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에서도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뤽상부르의 아파트에는 백남준, 이우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 등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의 아파트는 넓었고 술과 요리가 풍요로웠다.

한국인 화가 중에서 가장 와인에 정통하다는 이우환(1936~), 프랑스의 농장주 협회에서 와인을 제대로 아는 문화인에게 수여하는 기사 작위를 받은 유일한 한국인 김창열, 이 둘이 만나면 와인 선택을 두고 심각한 토론이 벌어진다. 최고의 지식과 최심의 직관력, 둘 다 지극한 경지다. 김창열은 부르고뉴 와인도 좋아했지만 론 지방의 지공다스 와인 또한 애호했다. 김창열의 와인 감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와인이 가장 좋습니까?”라고 물으면, “가장 비싼 걸 마시면 돼” 하고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값이 비싸게 매겨진 와인에는 그럴만한 이유 즉, 높은 가치가 그 속에 숨어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장인은 파리 근교의 넓은 시골집을 사위에게 위임했다. 한국에서 중요한 미술관계자가 오면 시골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파리의 후배 화가들을 초대하여 소개했다. 마당에선 양 두 마리를 통째로 구웠다. 엄청난 양의 과일과 포도주가 배달됐다. 김창열의 아침은 소박했다. 가정용 일제 떡 기계로 만든 인절미 한 조각에 미역국이 전부다. 대신 파티는 거창했다.

1980년대 중반 평창동에 우규승의 설계로 작업실 겸 자택이 지어졌다. 1990년대에는 남불의 드라기냥에도 새로운 작업실을 마련했다. 평창동 이웃 구기동에는 싸리집이라는 보신탕집이 있다. 김창열과 우규승은 단골이 됐다. 갤러리현대의 두가헌에서 양고기 요리를 내놓자 한 달에 한 번은 찾았다. 평안도 출신답게 고기를 먹고 나면 꼭 찾는 게 냉면이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냉면이 들어갈 배는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평안도 출신, 고기 먹은 뒤엔 냉면

왼쪽부터 이우환, 윤형근, 김창열, 박서보, 갤러리현대 ‘한국현대미술 4인의 방법전’, 1979년. [사진 갤러리현대]

왼쪽부터 이우환, 윤형근, 김창열, 박서보, 갤러리현대 ‘한국현대미술 4인의 방법전’, 1979년. [사진 갤러리현대]

1980년대 후반부터 그의 물방울 작업에는 한자가 들어갔다. 어릴 때 평안남도 맹산에서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천자문이 주로 동원됐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이란 한자 위에 그의 영롱한 물방울이 얹혔다. 물방울은 물의 순간적인 현상이다. 그 물마저도 곧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물방울의 형상은 사라져 버리고 없고 투박한 물감 덩어리만 나타난다. 물방울이라는 일루젼과 물감이라는 물성 사이를 하나의 캔버스에서 극단적으로 오갈 수 있음을 보여 준 게 세계현대미술계에 통했다. 일루젼과 물성의 거리는 천과 지, 공간의 집인 우(宇)와 시간의 집인 주(宙), 본질과 현상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급기야 캔버스 위에 천자문을 계속 겹쳐 쓰면서 무슨 글자인지도 모를 지경까지 갔다. 천지현황, 우주홍황의 경계에 오직 하나, 붓을 움직이고 있는 내 몸의 부단한 수신(修身)만이 있을 뿐이라는 경지였다. 곧 사라질 물방울과 같은 찰나적 삶의 운명에서 영원을 길어 내는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

2016년 그가 전쟁 때 근무했던 제주시에 김창열미술관이 들어섰다. 그의 육신과 그가 육신으로 보았던 물방울은 다 떠났는데, 그림 속의 물방울은 큰 가르침처럼 사라질 생각 없이 영롱하게 맺혀 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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