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랑스뽀이’ 이일, 안주 안 먹고 와인 즐겨 영양실조도

중앙선데이

입력 2021.06.1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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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호 26면

예술가의 한끼

이일은 한국에선 국산 와인을 즐겨 마셨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서재. [사진 이일 유족]

이일은 한국에선 국산 와인을 즐겨 마셨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서재. [사진 이일 유족]

1959년 일본인 청년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1931~2011)는 파리의 미술전시장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본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이끄는 교토대학의 물리학 연구실에 소속된 이론물리학도였다. 1955년 교토대학 대학원생 신분으로 미술평론를 발표하고서 진로가 바뀌었다. 도쿄로 상경하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동안 학원을 다니며 불어회화를 익혔으나 그의 초보 불어는 파리에 도착하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말문이 막힌 ‘일본의 수재’를 아는 체하는 파리지앵은 아무도 없었다. 낙담의 날들이 그를 기다렸다.

파리 유학, 특파원 출신 미술 평론가
일본 미술계 거물 나카하라와 인연
한·일 미술 교류, 지역 연대에 기여

집 근처 가게, 항상 노블와인 준비
대학 제자들과 어울려 술 먹기도

세계미술 흐름 포착, 명쾌한 평론
‘정신 밥’은 대식 ‘육체 밥’은 소식

어느 날 전시장에 섬세한 용모의 ‘프랑스 청년’이 나타났다. 기품이 느껴지는 골격과 몸짓에 통찰력으로 가득 찬 지적인 눈빛에 좌중이 주목했다. 일본의 수재는 이 프랑스 청년의 매력에 이끌려 서툰 불어로 자신을 소개하며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프랑스 청년은 껄껄 웃으며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은 한국인 이일(1932~1997)이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공용어인 일본어 덕분에 나카하라는 그동안 닫혔던 말문이 한꺼번에 터졌다. 둘은 그 자리에서 친구가 되었다.

파리비엔날레 커미셔너 두번 맡아

최기원의 조각과 박서보의 그림 앞에서 앙드레 말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왼쪽)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이일, 제3회 파리비엔날레, 1963년. [사진 이일 유족]

최기원의 조각과 박서보의 그림 앞에서 앙드레 말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왼쪽)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이일, 제3회 파리비엔날레, 1963년. [사진 이일 유족]

나카하라에게 이일은 구세주였다. 완벽한 불어 구사자 이일과 동행하니 언어가 해결되었고 드디어 파리의 진면목이 제대로 포착되었다. 이일의 수준 높은 교양이 이끄는 대로 파리의 미술현장을 섭렵했다. 당시의 일본인에게 한국은 몇 수 아래였다. 생물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압도적인 우월함을 지닌 친구 이일과 사귀면서 나카하라의 한국관은 바뀌었다. 이렇게 준수한 인물을 배출해 내는 한국이란 나라가 눈부시게 떠올랐다. 얼마 뒤 박서보(1931~ )가 파리를 찾았을 때 이일은 나카하라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이일은 평안남도 강서 출생이다. 이일(李逸)은 필명이고 본명은 이진식(李鎭湜)이다. 평양고보를 다녔는데 월남하여 서울의 경복고를 졸업했다. 서울대 불문학과에 진학하면서 문리대문학회를 조직하고 김규태, 이어령, 박맹호, 성찬경, 이상일 등과 함께 ‘문학’을 창간했다. 1957년 도불하여 파리대학 문과 4대학 미술사학과를 1963년에 수료했다. 이후에는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으로 지내다 1965년에 귀국하여 1966년부터 홍익대 교수가 되었다.

이일은 1961년 박서보와 함께 제2회 파리비엔날레의 현장 커미셔너를 맡았고(공식 커미셔너는 김병기), 1963년에는 제3회 파리비엔날레의 현장 커미셔너를 맡았다(공식 커미셔너는 김창열). 당시엔 한국의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커미셔너는 파리까지 갈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겨우 작품만 보내었다. 현장에 상주하는 이일이 실제적인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작가 소개를 위한 서문도 직접 썼다. 앙드레 말로(1901~1976) 같은 거물 문화인이자 정치인이 전시장에 나타나면 한국 미술과 작가에 관한 설명도 해야 했다. 실전경험이 거듭되면서 이일은 점점 미술현장의 전문가가 되어 갔다.

청년 이일과 청년 나카하라의 만남은 구체적인 일로 이어져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에 큰 열매를 맺는다. 일본 미술계의 비평과 기획의 거물로 성장한 나카하라는 도쿄화랑, 이낙스 등의 고문으로도 활동하게 되는데 그 현장은 고스란히 한국현대미술가들의 발표무대가 된다.

1975년 도쿄화랑에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 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대표적 흐름을 이루는 단색화의 얼개를 제시하는 출발점이 된다. 전시의 서문은 나카하라가 맡았다. 박서보는 작가로 참여했다. 나카하라, 재일화가 이우환, 도쿄화랑 야마모토 사장 등이 내한하고 이일과 명동화랑 김문호 사장 등이 개입하여 이루어진 한·일 간의 기획전시였다. 한국현대미술의 국제화를 위해선 우선 서울과 도쿄 사이의 지역적 연대가 필요했다. 이일과 나카하라, 두 청년의 우연한 만남에서 그 연대가 시작되었다. ‘후랑스뽀이 리상’(너무나 프랑스적인 이일씨, 일본 미술인들이 붙여 준 별명)은 세련된 언어로 한국의 현대미술을 일본에 알렸다. 나카하라, 도쿄화랑 사장 등 일본 미술인들의 한국 방문이 빈번해졌다.

이일(왼쪽)은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6년. [사진 이일 유족]

이일(왼쪽)은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6년. [사진 이일 유족]

불어 발성법이 섞인 이일의 목소리는 명품이었다. 말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어쩌다 그가 내뱉는 짧은 말도 뒷부분에 가선 발음이 흐려지며 잘렸다. 잘린 빈 공간을 이미 어딘가 먼 곳으로 달아나 버린 그의 몽상이 메꾸었다. 상대방을 몽롱하게 하는 특이한 화법이었다. 서구적이고 이지적인 외모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렀다. 그러나 실상은 엉터리일 정도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문학청년 시절의 친구인 시인 천상병(1930~1993)을 명동에서 만나 맥주 한 병의 접대로 따뜻한 기억을 남기는가 하면 홍익대 동료인 하종현(1935~)과 청진동 삼삼집에서 막걸리와 젓가락 장단으로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프랑스가 너무나 멀던 시절에 국내에서는 이일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미지의 세계로 향한 문이었다. 먼 곳이 막연히 그립고 궁금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일 역시 제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다정다감은 술로 이어졌다. 홍익대 정문 맞은편 왼쪽에 자그마한 구멍가게가 있었다. 강의하러 학교로 가기 전 거기서 맥주 한 병을 들이켰다. 지나가는 학생이 있으면 불러다 함께 마셨다. 일체의 권위를 내려놓은 그의 모습을 학생들은 좋아했다. 정초가 되면 제자들이 북아현동 그의 집으로 세배를 갔다. 인사차 받은 됫병 청주를 집 근처의 구멍가게에서 최초의 국산와인인 노블와인으로 바꾸어 마셨다. 노블와인을 홀짝홀짝 마셔 가며 원고를 썼다. 술이 떨어지면 딸에게 술 심부름을 시켰다. 이일을 위해 늘 노블와인을 준비하고 있는 가게 주인은 딸의 양손에 와인병 하나씩을 쥐여 주었다.

충청도 출신의 부인 김기현은 보쌈김치, 큼직한 평양만두, 빈대떡 등 시댁의 평안도 요리를 익혔다. 집에서는 부인이 차려 주는 정성스런 음식을 잘 먹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안주를 멀리했다. 조각가 김청정(1941~ ) 등과 어울려 젊은 시절의 한때를 보낸 부산의 자갈치시장 횟집에 가도 생선회에는 손대지 않고 술만 마셨다. 이런 습관 때문인지 두어 번 영양실조에 걸렸다. 파리에 가기 전 그의 형 이경식 감독의 권유로 전쟁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대사는 단 세 마디. 추워요. 배고파요. 밥 주세요. 평생 살이 쪄 본 적이 없는 이일에게 딱 어울리는 대사였다. 정신의 밥에는 대식가였지만 육체의 밥에는 소식가로 일관했다.

‘불꺼진 창’ 애창, 영화에 출연도

20대 후반이던 1960년의 이일.

20대 후반이던 1960년의 이일.

이일은 가정적이었다. 주말에는 딸 유진, 유리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를 보았다.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등을 번갈아 보았다. 명화극장을 맡은 영화평론가 정영일(1928~1988)의 해설을 좋아했다. 파리 생활 동안 자연스레 익힌 영화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지만 어떤 영화를 볼지는 세 딸과 상의했다. 이일에게 있어 예술영화의 호불호 판단 기준은 감독이었다. ‘내 이름은 튜니티’, ‘황야의 무법자’ 같은 서부영화도 좋아해서 보고 또 보았다.

차이콥스키를 틀어 놓고는 지휘를 했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지휘도 하고 노래도 불러야 했다. 대학생 이일의 애창곡은 빈센초 벨리니 작곡의 ‘불 꺼진 창’이었다. ‘불 밝던 창에 어둠 가득 찼네. 내 사랑 넨나 병든 그때부터’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여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여동생 둘은 선망의 대상인 오빠의 미성이 이끄는 ‘불 꺼진 창’을 따라 부르며 넨나의 죽음을 아파하였다.

시인 출신답게 이일의 글은 본질을 향해 곧바로 돌진하는 명쾌함이 특장이었다. 그 명쾌함으로 세계미술 흐름의 저류를 실시간으로 포착하여 그 위에 국내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비추었다. 이일 평론의 핵심어는 환원과 확산이다. 환원은 본질을, 확산은 생성을 향한다. 그는 이제 생성을 멈추고 우주로 환원하여 불 꺼진 창의 넨나처럼 ‘땅속에서 홀로 단잠을 자고’ 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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