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그 영화 이 장면

노바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액션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처절한 살육이 끝난 후 모든 것을 불태우는 장면이다. 이러한 화염의 풍경은 허무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감상적인 톤을 만들어낸다. 오로지 죽고 죽이는 관계로 점철될 수도 있었던 장르 영화는 불의 힘을 빌려 인상적인 비주얼을 지닌 영화로 고양되는 셈이다.

‘하드코어 헨리’(2015)로 신선한 충격과 함께 데뷔했던 일리야 나이슐러 감독의 최근작 ‘노바디’도 불태움의 미학을 따른다. 심상치 않은 과거를 지녔지만 지금은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아가고 있는 허치 맨셀(밥 오덴커크). 하지만 의도치 않게 폭력의 세계에 휘말린 그는 다시 칼과 총을 잡게 되고, 핏빛 전력이 소환된다. 여기서 첫 번째 불 지르기. 갱스터 율리안(알렉세이 세레브랴코프)의 조직원들은 허치의 집을 습격하지만 전멸하는데, 이때 허치는 턴테이블과 레코드판을 이용해 지하실에 불을 지르고 대학살의 증거를 없애 버린다.

영화 ‘노바디’

영화 ‘노바디’

공들인 편집과 촬영 그리고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결합된 이 장면이 아름답다면, 두 번째 화재 신에선 모든 것을 끝내 버리겠다는 결연함이 느껴진다. 율리안의 소굴로 혈혈단신 잠입한 그는 수많은 적들을 제거한 후 러시아 마피아들의 연금을 불태워 버린다. 불타고 있는 엄청난 양의 지폐들. 악당에겐 생명과도 같은 더러운 돈은 잿더미로 변했고, 그렇게 생명을 잃은 율리안은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된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