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운전대 잡은 미국…극한 갈등에도 일단 협력 약속한 중·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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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왼쪽), 존 케리 기후특사가 22일(현지시간) 화상으로 개최한 기후 정상회의를 백악관에서 진행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왼쪽), 존 케리 기후특사가 22일(현지시간) 화상으로 개최한 기후 정상회의를 백악관에서 진행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이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22일(현지시간) 미국이 개최한 세계 기후 정상회의를 두고 마이클 리건 미 환경청장이 한 말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기후변화 문제에 가장 소극적인 나라 중 하나던 미국은 40개국 정상을 화상으로 불러 대책을 논의하는, 기후 대응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됐다.
이날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에서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05년 수준보다 50~52% 줄이겠다고 밝혔다.
2025년까지 26~28% 감소를 제시했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때보다 더 파격적인 목표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위해 2035년까지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면서 전기를 생산하는 무공해 전력을 갖추겠다고 밝혔다. 2050년까지는 배출되는 탄소의 양과 공급되는 산소의 양을 맞추는,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고도 했다.
백악관은 이런 목표가 달성될 경우, 2100년쯤이면 산업화 이전과 비교한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치가 1.5℃ 이하가 될 거라고 내다봤다.

바이든, 미 온실가스 절반 감축 약속 #EU위원장 "미국 다시 우리 편 돼 기뻐" #중·러, 협력하지만 미국 주도엔 견제 #"적대적 국가와 협력 가능성 볼 시험대"

4년 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탈퇴했다.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는 중국이 꾸며낸 거짓"이라는 이유였다. 존 케리 기후특사는 미국의 이런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당시 결정에 대해 "팩트도 없고, 과학도 없고, 합리적 판단도 없었다"면서 "트럼프의 기후 정책이 세계 무대에서 미국의 신뢰를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참가국 정상들은 이런 미국의 변화를 환영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미국의 새로운 목표를 '게임 체인저'라고 평가했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기후변화와의 싸움에서 미국이 다시 우리 편이 돼 기쁘다"고 말했다.

22일(현지시간) 시작된 기후 정상회의에는 40개국의 정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화상으로 진행됐다. 한국·일본 등 미국의 우방국 뿐 아니라 중국·러시아 등 갈등 관계에 있는 나라들도 참석했다. [AFP=연합뉴스]

22일(현지시간) 시작된 기후 정상회의에는 40개국의 정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화상으로 진행됐다. 한국·일본 등 미국의 우방국 뿐 아니라 중국·러시아 등 갈등 관계에 있는 나라들도 참석했다. [AFP=연합뉴스]

이번 회의는 미국과 극심한 갈등 관계에 있는 중국·러시아 정상도 참석한다는 점에서 시작부터 관심을 끌었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과 대만·신장 문제 등으로, 러시아와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문제 등으로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화상이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취임 후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다.
중·러 정상 모두 민감한 현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기후 변화 대응에 대해서도 협력을 약속했지만 미국 주도로 논의되는 것에 대해서는 견제의 목소리를 냈다.
기존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간 감축 목표치를 낸 다른 참가국과 달리 구체적인 숫자도 제시하지 않았다.
시 주석은 2030년 탄소 배출이 정점을 지나면 206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당초 목표를 다시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워싱턴포스트(WP)는 "세계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목표를 이루겠다는 것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일부 정상들 사이에서 여전한 견해차도 확인됐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은 앞서 많은 탄소를 배출했던 부유한 나라들이 이제는 저소득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P는 이번 정상회의가 취임 100일을 맞은 바이든 정부에 상징적인 행사가 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중국·러시아와 같은 적대적 경쟁자와 갈등을 빚으면서도 지구 온난화 등의 문제에선 협력할 수 있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생각이 옳은지 테스트할 기회가 됐다고 전했다.
워싱턴=김필규 특파원 phil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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