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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시끄럽게 살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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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채혜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지난겨울 업무차 제주도를 갔을 때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에 택시를 불렀는데, 위치 문제로 택시기사와 몇 초 통화한 게 화근이었다.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게 된 택시기사가  “술 한번 먹자”며 연락을 계속 걸어와서다.

제주를 떠나는 마지막 날 새벽, 하나뿐인 호텔 출입구 앞에서 그 택시를 봤을 때는 머리털이 쭈뼛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호텔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한 시간 후 전화해서 연락이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부탁한 뒤 마지 못해 택시를 탔다. 설마 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연결된 전화에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남성들은 살고, 여성들은 살아남는다”(『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고 했던가. 그 후 여성이 남성에게 희생됐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살아서 다행”이라던 직원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이런 말들에 근거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서울 노원구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A씨. [뉴스1]

서울 노원구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A씨. [뉴스1]

경찰청 범죄통계(2019년 기준)에 따르면 강력범죄(살인·강도·성폭력·방화 등) 피해자의 85%는 여성이었다. 통계청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20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2018년 성폭력은 3만1396건 일어났다. 매일 80건 넘게 성폭력이 발생하는 셈이다.

통계만큼 실제 삶도 혹독하다. 혼자 사는 동성(同性) 친구를 걱정하는 건 이미 일상이다. 이 친구를 만나고 헤어질 때는 “가는 길에 전화해”라는 말을 반드시 덧붙인다. 엄마는 나와 여동생의 귀가가 늦어지면 연락이 될 때까지 전화하지만, 남동생은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찾지 않는다.

계용묵 작가는 『구두』(1949)라는 수필에서 앞서 걷던 여자가 자신의 ‘또그닥또그닥’ 구두 소리에 두려움을 느끼고 휭하니 내달았던 경험을 풀어냈다. 치한 취급을 받아 못내 억울했던 계 작가는 이렇게 한탄했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계 작가에게 답한다. “여자 뒤를 걷는 모든 남자가 범죄자는 아니지만, 앞서가는 여자는 뒤따라오는 모든 남자를 두려워한다”(『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말처럼 여자의 경계에는 이유가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그리고 그 후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지만, 지금 시대를 사는 여자들도 그때 그 여자처럼 두려움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라고.

지난 3월 발생한 이른바 ‘노원구 세 모녀 살인사건’의 피의자 신상을 공개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청원인은 “하루에도 여성 수십명이 죽어가지만 세상은 왠지 조용하다. 조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청원에는 24만 명이 동의(4일 기준)했다. “더는 조용하게 살지 말자”는 댓글을 보며 다짐했다. 나는 이제 시끄럽게 살기로 했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